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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50] 로마의 소나무 그늘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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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방문객은 대부분 관광객입니다. 관광(觀光. Sightseeing). 말 그대로 눈으로 보는 겁니다. 시간은 많지 않고 볼 것은 많으니까 보는 순간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사진 찍기. 관광지에서의 사진 찍기는 이런 욕망과 관계가 있지요. 독일 철학자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인간의 성향을 '소유'와 '존재'로 나눕니다. 소유는 자기 바깥의 것들을 더 많이 가지려는 성향, 존재는 작은 소유만으로도 충분한 행복감을 느끼는 성향입니다.


소유의 성향은 콜로세움 앞에서 사진 찍는 게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로마의 상징 앞에 있다'는 걸 입증함으로써 동질감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무의식이 작동합니다. 존재의 성향은 콜로세움을 눈으로 보는 차원을 넘어 오감 모두를 동원해 만나려고 합니다. 온몸으로 받아들여 일체화하려는 무의식이 작동합니다. 자연지리학자 권동희 교수는 프롬의 소유와 존재의 차이를 관광과 여행의 차이로 바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즘 여행의 트렌드 중 하나는 체험 여행이다.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다양한 액티비티는 중장년 아니 노년에 이르기까지 도전과 모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체험 여행이 꼭 과격한 액티비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주변에는 여행 원칙의 하나로 '사진 적게 찍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 수는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사진 한 장 덜 찍고 그 시간에 오감으로 그 장소를 감상하고 온몸으로 기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여행의 특권임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은 소유의 또 다른 이름이다."('여행의 지리학', 2018)


고대 유적지 앞에서 사진 찍는 게 로마 관광의 특성입니다. 하지만 몇몇 여행자는 순간순간의 살아 있는 장관을 놓치지 않습니다. 저는 로마의 소나무가,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소나무가 유적지의 장관보다 가슴 설레고 뜨끈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보던 소나무와 다릅니다. 틈만 나면 하염없이 바라보곤 합니다. 소나무바라기. 먼산바라기는 가끔 해보지만 소나무바라기는 로마 여행의 습관이 됩니다.


오늘날 인류에게는 지혜와 유랑의 유전자가 함께 들어 있을 겁니다. 지혜인(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은 경험 바깥의 세계를 관찰하기 위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갑니다. 이름 하여 방랑자(호모 위아토로. Homo Viator).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인류의 조상이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간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이론에 따르면 인류에게는 '지혜로운 방랑자'의 유전 형질이 있지 않을까요? 느끼고 살피고 떠돌고 생각하는 유전자가 제게 소나무바라기 습관을 가져다주는지 모르겠습니다.

로마의 소나무는 시내 전역에 많습니다. 유적지의 정원수는 물론 가로수인 경우도 흔합니다. 특징은 크고 곧고 굵고 잘생겼다는 점. 상층 부분만 가지를 넓게 펼쳐 이파리를 달고 있습니다. 펼친 우산 같기도 하고, 나무 위에 구름 걸린 것 같기도 하지요. 로마의 소나무는 우산 나무, 큰머리 나무, 초록구름 나무…, 아이들이 동시를 쓰면 이렇게 표현할 듯도 합니다.


시내 중심지 로마 폐허의 터전인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 언덕의 소나무가 제겐 특별한 장관입니다. 커다란 머리를 맞대고 일렬횡대로 늘어선 나무병정들. 멀리서 보면 외따로 떨어진 우람한 장군 옆에 도열해 있는 로마 병사들 같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늘이 시원합니다. 고대 중국의 멋진 시와 노래를 모아놓은 '시경'에는 여성의 시원함을 나무그늘에 비유해서 뭇 남자들을 쉬게 하고 가문을 번성시키는 미덕을 노래하는 구절이 있지요. "복숭아나무의 젊음이여/잎사귀도 푸르게 짙어 있구나./이 처녀 시집가면/온 집안사람 시원스러리."


로마의 소나무 역시 지혜로운 방랑자들을 위해 그늘을 드리워줍니다. 나무를 젊은 처녀에 비유한들 로마 병사에 비유한들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멀리서 바라보는 눈의 시원함과 가까이 그늘에 들어 느끼는 몸의 시원함의 차이를 체험하는 것이지요. '온 집안사람 시원스러리.'는 '시경' 원문엔 '宜其家人'인데, 이는 집안사람 모두를 화목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끌탕하는 마음을 달래준다는 뜻에서 나무 그늘 아래 가면 사람이 시원해진다는 뜻으로 번역하면 한 멋 더 납니다.


보송보송 말라가는 이마 위의 땀방울. 그 시원한 기분. 소년 시절에 읽은 이제하(1937~)의 학창 시절 명시 '청솔 그늘에 앉아'(1953)가 떠오릅니다. "청솔 그늘에 앉아/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노곤한 그리움이여/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다정한 얘기가 하고 싶다. (…)" 누구에게나 있는 그리운 당신. 지혜로운 방랑자의 유전자 속에 있는 '시원한 사람'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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