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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하다'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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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시인 김혜순이 세계적 권위의 시문학상인 캐나다의 그리핀 시문학상(The Griffin Poetry Prize)을 받았다. 최돈미 번역가가 영어로 옮긴 '죽음의 자서전'이라는 작품이다. 한국인 최초다. 최초, 권위, 이런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필자이나 유쾌한 소식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 쓴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영역돼 맨부커상을 받은 이후 3년 만에 시 분야에서도 좋은 소식이 들려와 기쁘다. 번역을 통해 우리 문학을 세계의 다른 언어권 독자에게 알리는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해온 필자로서는 이 좋은 소식을 더 많은 이와 나누면서 문학을 하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고자 한다.


시인 김혜순의 시론은 한마디로 '시하다'로 요약할 수 있다. 통상 시를 쓴다, 소설을 쓴다고 하지 시를 한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김혜순 시인이 '하다'라는 동사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시인에게 '여성, 시, 하다'는 늘 함께 따라다니는 세 개의 단어다. 여성이 시를 한다는 것. 시인은 내 안에서 내 몸인 여자를 찾아 헤매고 꺼내는 작업을 '시하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오랜 세월 남성에 비해 차별과 폭력, 소외, 혐오에 노출돼온 여성의 역사와 여성의 현실을 낳는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이 '여성, 시, 하다'라는 말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지난 5월 한국문학번역원에서 개최한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 행사에서 시인은 '여자짐승아시아하기'라는 제목의 발표를 했다. 여기서 시인은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 우리가 여성이라는 것을 우리가 제일 모른다고 강조했다. 그 모름을 '한다'라는 행위로 이행하는 것이 시인의 글쓰기가 보편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점일 것이다. '하다'는 '쓰다'보다 이행과 실천의 방식에서 더 적극적이고 전위적이다. 침묵하지 않고 말하는 행위. 삼키지 않고 뱉어내는 행위. 죽음을 방관하지 않고 그리고 고발하는 일. 이 모든 적극적인 행위를 '하다'라는 단어가 껴안고 있다.


경계를 건너는 일. 가려진 진실을 드러내는 일. 막힌 통로를 어떻게든 뚫고자 애쓰는 일.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두드려보는 일. 더럽고 구차하게 여겨지는 일을 선의의 목적을 위해 감당하는 일. 배타적인 억압과 구속을 안간힘으로 헤치고 나아가는 일. 이 모든 일이 '하다'의 의미다. 판문점의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북측으로 건너가 이뤄진 미국과 북한 지도자의 만남도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어떤 '하다'의 이행이다. 그 '하다'의 이행은 불가능하게 여겨지던 일, 금기로 생각되던 일, 주변부와 게토의 영역에서 소외된 존재들을 밝은 빛의 세계로 끌어내는 일, 끊어진 호흡을 잇는 일 모두를 가능하게 한다.


지금껏 상상 속에 머물렀으나 현실에서 이행되지 않은 일들을 구체적인 실재로 감각하게 하는 일. 그 모든 쓰기와 말하기, 움직이고 걷고 나누고 가능하게 하는 적극적인 행위가 '하다'다. 그 '하다'는 익숙하고 당연한 세계에서 한 걸음 더 걸어나와 낯선 이방의 세계를 껴안는 일을 포함한다. 가난과 궁핍의 땅에서 사람답게 살 자유를 찾아나선 아이가 아빠의 품에서 죽은 채 발견되는 이 비참의 세계 또한 '하다'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어떤 '하다'를 고민하고 행하고 있는가.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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