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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명함 없는 애/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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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사람, 취한 사람, 또 취한 사람…… 지나가는 사람들만 쳐다보려니 재미가 없었지, 할 게 없어서 꺼내 봤어 오늘 받은 금테 명함들, 아, 이게 진짜 성공의 냄새지! 맥주를 홀짝이며 한 장씩 땅에 흘려 버렸어


아직. 안. 왔니?

눈이 풀린 채로, 언니는 중얼거렸지 아예 정신을 놓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구나! 아직이야 언니, 내 대답에 그래, 오면 깨워 줘, 말하며 다시 코를 골았지 나는 언니 손등을 몇 번 두드려 줬어


새벽 네 시, 편의점 테이블에 동기 언니랑 둘만 앉아 있었어, 고마웠지, 정신 잃고 엎드려 있어도 거기 있어 줘서 고마워, 아까는 더 고마웠지, 언니 번개에, 하나둘 도착한 동기 애들이 술 몇 잔에 금세 필 받아서는 배틀을 시작했어


놀랐네, 층마다 수면실이랑 발 마사지기가

우린 장례식장에 수저랑 그릇 세트가 나와, 회사 로고가 찍혀서!

나 있는 데서는 서울 타워가 그냥 보인단다

명함 있는 애들 얘기를 들으며 나, 빠져들었지, 치킨 생각에……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까 다들 그랬어


너는 왜 아무 말도 없어,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살짝 미소 지으며, 그럴 리가, 말하니까 동기들은 다시 얘기를 이어 나갔지 지난번에는 말야, 아이디카드 걸고 회사 근처에서 담배 피우다가 깨졌지 뭐야, 와, 너희도 금연 필수? 아니,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고…… 와하하하, 내 표정은 점점 진지해져만 갔지, 나는 또 빠져들었어, 이번에는 족발…… 족발은 말야, 할 일 없을 때가 아니라 열 일 제쳐놓고 먹을 때가 최고지, 생각만으로도 다 먹은 것처럼 울렁거려서 화장실로 갔지 언니가 뒤따라 들어와서는 어깨를 두드려 줬어 미안해, 너 술 사 주는 자린데 이상한 애들만 왔구나…… 내가 활짝 웃으며 노 데미지, 화답하니까 언니는 슬픈 얼굴로 말했어


근데 너, 그 애들 올 때마다 수저 세팅해 주더라, 물티슈까지…… 너 그런 애 아니잖아?


누가 때린 것도 아닌데, 거기서 무너졌지 훌쩍이면서 내가 물었어 나 뭐 생각하고 있는지도 다 보여?


그럼 보이지, 아주 슬픈 생각……


방청객 마인드로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먼저 일어섰지 놀란 애들을 놔두고, 언니랑 같이 일어섰어 그리고 편의점, 우린 맥주를 더 먹었지 언니가 쓰러질 때까지 더 먹었어 어디선가 치킨 냄새가 나고…… 치킨 냄새만 맡으면 왜 난 눈물이 날까, 혼잣말을 하려니까 언니는 엎드린 채로 대답을 해 줬어


고마운. 거지. 네가 시키면. 언제든. 오잖아.


마침내 대리 아저씨가 도착했지 언니를 부축해 언니 차에 태우니까 언니가 정신을 좀 차렸지 언니 차 바꿨구나? 내가 말하니까 언니는 웃으며 끄덕였어 내 볼을 토닥이다가 나를 안아 줬지 그러고는 내 손에 뭘 주었다


언니가 떠나고 손을 펼쳐 보았어 오만원짜리 두 장…… 언니…… 나는 언니가 사라진 쪽을 바라봤지


깜짝 놀랐어


나도 모르게 언니 복을 빌고 있었다.



[오후 한 詩]명함 없는 애/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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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말하고 싶지 않다. 절망 또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바라는 건 정말이지 평범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야 어떻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집을 장만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무탈하게 키우면서 늙어 가는 것, 이런 것들이 그들이 간절히 이루고자 하는 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평범함이 이상(理想)이 되어 버렸다는 게 말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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