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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45] 미라보 다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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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별의 봄날이 갑니다. 엊그제 꽃 피더니 오늘 꽃이 집니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시인 김영랑(1903~1950)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이렇게 노래하지요. 짧은 봄을 애처로워하는 절창입니다.


생이별의 봄날을 저는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봅니다. 미라보 다리를 아시는지요? 파리의 아름다운 다리들 중에서도 이별의 시심이 가득한 다리입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러나 괴로움 뒤에 오는 기쁨을 나는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는 여기 서서 이렇게 노래했지요.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 아픔을 꽉 깨물고 싶어서 속으로 혼자 소리친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가버린 사랑을 가슴에 심습니다. 남겨진 시인은 다리와 하나 되어 흐르는 강물을 바라봅니다. 스스로 깨문 그 입술,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입술 깨무는 아픔 헤아려 보는 게 제가 미라보 다리를 찾는 이유입니다. 이십대의 젊음을, 사랑과 상처를 곱씹어 보는 것이지요. 여자가 남자에게 결별 선언을 할 때 남자의 가슴이 휑하니 베어지는 기분을 지금인들 왜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예술이 우리를 대신해서 희로애락을 표현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똑같은 경험을 해보지 않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법입니다. 세기의 명시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를 읊조리고 있으면 연인과 헤어진 시인의 애절한 심정을 자기 일처럼 느끼게 되지요. 이것이 예술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요? ‘헤어지면 이토록 가슴 아프구나!’


이별은 고통만이 아니라 성숙이라는 또 다른 선물도 줍니다. 봄날의 생이별 뒤에 여름의 무성한 초록과 가을의 풍성한 열매가 오듯이 말입니다. 이런 이별이 상이별(上離別)이지요. 이형기(1933~2005) 시인도 명시 <낙화>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할 때 (…) 나의 사랑, 나의 결별/샘터에 물고이듯 성숙하는/내 영혼의 슬픈 눈”


시인은 결별이 오히려 축복이라고 말하네요. 잎이 져야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의 법칙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언어들이 맑고 깨끗합니다. 이런 순정한 언어가 무뎌진 일상에 촉촉한 감성을 불러일으킵니다. “괴로움 뒤에 오는 기쁨을 나는 기억하고 있나니…” 상심한 영혼들에겐 더없는 위로가 아니겠습니까.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도 볼 수 있는 위로 말입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인생사의 다반사. 스물일곱 청년 아폴리네르는 세 살 연하인 마리 로랑생을 그녀의 개인전이 열리는 전시장에서 만납니다. 그녀는 시와 그림을 사랑한 젊은 예술가였습니다. 피카소가 그 둘을 소개하지요. 두 사람 다 예술적 기질이 강해서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깁니다. 휘발성 강한 불꽃. 그래서인지 연인의 사랑은 5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헤어진 사연이야 구구절절 많지요. 분명한 건 둘 다 너무 아파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에 빠진 모든 연인은 행복하고 실연한 모든 연인은 슬픔에 빠집니다. 그러나 슬픔이 곧 불행은 아닐 테지요. 만약 그들이 불행하다면 서로에게 잊히는 걸 겁니다. 기욤도 마리도 서로에게 잊히는 걸 두려워했지요. 헤어졌지만 늘 그리워했습니다.


“너는 나의 마리. 센 강변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바람 불면 귓가로 스쳐 가는데, 나는 너의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마르지 않는 강물은 흐르는데, 오늘도 내일도 흘러만 갈 텐데, 사랑하고 사랑하였던 나의 마리”


봄바람처럼 귓가에 와 속삭이는 소리. 마리 로랑생이 이 목소리를 어찌 잊겠습니까. 그녀는 연인이 자기를 잊을까 봐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잊힌 여자, 잊히는 건 가장 슬픈 일’이라는 시 구절도 남깁니다. 이들은 ‘페르 라 쉐즈’ 공동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아폴리네르가 죽은 뒤 마리는 38년을 더 살다 가지요. 아폴리네르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영원히 잠든 마리. 일흔세 살의 마리는 ‘나는 너의 아폴리네르’라고 속삭이던 목소리를 잊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다시 목소리로 만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폴리네르이고 마리입니다. 어긋나는 사랑이 더 가슴 아프고 오래 가지 않나요? 하많은 시간이 흐른 뒤, 어떤 자리에서든 어느 내생에서든 우리는 다시 만날 테지요. 바람이 붑니다. 하롱하롱 꽃잎이 떨어집니다. 다리 위의 행인은 이제 작별을 고합니다. 파리여, 안녕히…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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