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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끝]생텍쥐페리의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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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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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후략)

김수영이 쓴 시 '폭포'다. 행과 연을 풀어 썼다. 끊임없는 떨어짐. 폭포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떨어진다. 남김 없음과 곧음은 몸을 던지는 행위의 본질을 설명한다. 몸을 던지는 자의 흔적은 묘연하고 자취는 개결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필연코 자유의 낙하다. 때로 비극일지라도! 사람의 작별 또한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몸으로 쓰는 이야기'는 이번이 101회째다. 작별의 시간. 여러분과 헤어지기 전에 연재를 시작할 때 준비해뒀던, 그리고 약속이기도 한 이야기를 한다.
2003년 8월4일. 월요일이었고 음력으로는 칠월칠석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현대의 정몽헌 회장이 세상을 떴다는 급보를 받았다. 신문사가 뒤집어졌고, 나는 고인 주변의 몇몇 임원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이든 들어야 했다. 기자의 일이 몹쓸 밥벌이라는 생각을 나중에 했다. 비통함과 어디를 향해야 좋을지 모를 원망 그리고 울분 같은 것이 명치 끝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됐다. 뭘 묻고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취재수첩에 갈겨 쓴 글씨들만 남았다. 그날 나의 전화를 받은 분들께 참으로 죄송하다.

나는 정 회장 생전에 몇 차례 함께 밥을 먹거나 차를 마셨다. 보통은 스포츠와 관련된 일(통일농구ㆍ현대 야구단ㆍ금강산 관광 등)로 회견을 할 때 그를 봤다. 정 회장을 마주 보며 선함으로 가득 찬 중년의 미소를 즐길 때는 농구에 대해 말할 때였다. 정 회장은 농구를 정말 좋아했다. 그의 농구 사랑이 '통일농구'를 만들었다. 1999년 처음 열린 통일농구는 현대 남녀 농구단이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경기를 해 나라 안팎의 관심을 모았다.

정 회장의 죽음 이후 통일농구도 중단됐다. 그렇기에 남북의 화해 분위기 속에 지난 4~5일 평양에서 열린 통일농구 대회는 나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나의 눈은 자꾸만 경기의 흐름을 놓치고 류경체육관의 관중석 어딘가에 앉았을 것 같은 정 회장을 찾고 있었다.
2006년 10월11일. 정 회장이 세상을 떠나고 세 번째 통일농구가 끝난 지도 3년이 지났을 때 나는 별렀던 칼럼을 썼다. "계동 사옥을 지날 때마다 정 회장을 떠올린다. 나는 언제나 정 회장의 마지막 순간을, 낙하나 투신이 아닌 비행(飛行)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는 생텍쥐페리처럼 마지막 비행에 나섰던 것이고 지금도 자유롭게 허공을 날고 있을 것이다."

꼭 쓰고 싶었지만 못 쓴 말도 있다. 정 회장이 누군가로 인하여 혹은 누군가를 위하여 몸을 던졌다면 그 누군가도 '생텍쥐페리의 비행'을 피하거나 거절할 수 없을 거라고 써야 했다. 곧은 소리가 곧은 소리를 부르듯,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떤 식으로든.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니, 모든 것이 덧없으되 아련하고도 막연한 그리움만 남았다.

문화부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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