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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100·끝]연못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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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계절입니다. 꽃들의 아우성이 귓가에 쟁쟁했습니다. 번쩍번쩍 손을 들고 소리쳐 부르는 연꽃들이 보였습니다. 시흥 '관곡지(官谷池)', 강화 '선원사지', 양평 '세미원'… 멀리는 부여 '궁남지', 더 멀리는 무안 '백련지(白蓮池)'까지. 이름난 연못들을 차례로 짚어나갔습니다. 관곡지와 백련지가 제일 나중까지 남았습니다.

관곡지는 우리나라 연꽃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조선 초기 '강희맹(姜希孟)'이 중국에서 씨앗을 가져다 처음 심었습니다. 시흥이 '연꽃 도시'로 불리는 까닭이지요. 백련지에선 연꽃의 지평선이 보입니다. 한 농부가 몇 뿌리 심은 것이 삽시에 끝도 없이 퍼져나가 오늘의 장관을 이룬 것입니다.
한 곳은 너무 가깝고 한 곳은 너무 멉니다. 멀든 가깝든 도로 사정과 교통 상황 눈치를 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운 곳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까딱하면 차 안에 갇히기 십상입니다. 먼 데로 욕심을 부렸다간 오늘 안에 돌아오기 어려울 테지요. 게다가! 꽃 나들이라고 어디 꽃만 보고 오게 됩니까.

순간 '첫사랑' 같은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전주 '덕진(德津) 연못'. 제 기억 속의 그곳은 연꽃 바다지요. 바다를 처음 본 산골 소년처럼, 알프스를 처음 본 남국 처녀처럼 황홀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 처음 연꽃을 보았을 것입니다. 연꽃도, 연꽃 축제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때까지 저는 꽃의 얼굴도 모르면서 '연화문(蓮花紋) 기와' '연화문 청자연적' 이름만 외웠습니다. 부처님 연꽃 자리는 알았으나 거기 새겨진 '복련(覆蓮)'의 실물을 본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 철 지난 연잎은 실제로 그렇게 훌렁 뒤집혀 있더군요. 연잎에 싼 밥이 훌륭한 도시락인 것도 먹어보고야 알았습니다.
상주 민요 '연밥 따는 저 처녀야…' 노래는 곧잘 따라 불렀지만 '연밥'의 효용은 잘 몰랐습니다. 연뿌리를 본 것도 '연근(蓮根)' 조림 맛을 알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송나라 주돈이(周敦?)의 '연꽃 사랑 이야기(愛蓮說)'를 배우고 나서야 연꽃이 모란이나 국화보다 윗길임을 겨우 알았습니다.

'심청'을 태우고 오는 용궁의 '탈것'이 어째서 연꽃일 수밖에 없는지도 뜨거운 여름날 연못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연잎은 우주선을 만들어도 좋을 만큼 완벽한 재질인 것 같습니다. 거기 구르는 물방울은 다이아몬드보다 귀해 보입니다. 연밥은 미사일만큼 강할 것입니다. 태양과 '일대일(一對一)'로 맞서는 체력이니까요.

연꽃은 천 년쯤은 우습게 넘나듭니다. 1951년 일본 식물학자가 도쿄대 운동장 땅 속에서 이천 년 전 씨앗을 캐내어 싹을 틔운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경남 함안산성에서 발굴된 씨앗이 700년 세월을 어제처럼 여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붉은 꽃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홍련(紅蓮)이었습니다.

'타임캡슐'이라 해도 좋을 연꽃의 생리(生理)를 터득한다면 신라나 로마쯤은 마음대로 오갈 것입니다. 베드로 성당이었던가 바티칸에서 본 돌확 속의 연꽃 한 송이도 떠오릅니다. 덕진 연못 연꽃 송이들이 사람의 얼굴로 보입니다.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것처럼 눈을 맞춥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보았던 '달라이라마'의 사진이 연못 위에 포개집니다. 어느 도시에서 열린 집회 사진인데, 달라이라마가 수많은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드는 광경입니다. 그 사진을 굳이 오려둔 까닭이 생각납니다. 제 눈에는 군중이 연못의 연꽃 송이 같고, 달라이라마는 꽃들에게 설법을 하는 부처처럼 보였습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까닭에 더 많은 찬사와 격려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유별난 일도 아닙니다. 세상 어느 꽃이 깨끗한 땅에서 피어날까요. 죄와 벌과 수치와 굴욕을 모두 끌어안은 흙, '예토(穢土)'일수록 저렇게 아름다운 꽃이 올라옵니다. 아니라면 강아지 똥에서 피어나는 민들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 풍진(風塵) 세월'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맑고 고운 연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라고 생각합시다.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시편('기탄잘리 20')을 소리 내어 읽고 싶어집니다. "연꽃이 피던 날 아아, 내 마음은 헤매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내 바구니는 비었는데, 그 꽃을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작별 인사를 해야겠습니다. 서정주(徐廷柱) 시인의 시('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로 대신하렵니다. 어느 꽝꽝한 속에서 연꽃 씨로 잠들어, 천 년 이천 년 뒤의 환생을 꿈꾸고 있을 사랑의 주인을 기다려봅니다.

"섭섭하게,/그러나/아주 섭섭하지는 말고/좀 섭섭한 듯만 하게,//이별이게/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어디 내생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연꽃/만나러 가는/바람 아니라/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엊그제/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한두 철 전/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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