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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내면의 해저(海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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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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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그 남자를 사랑했다. 그 남자는 우리의 친구였고, 그녀도 우리의 친구였다. 둘은 헤어졌고 헤어진 후에도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서로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철두철미 냉철했다는 사실이 사랑을 완성하지 못하게 했다. 지극히 지적인 두 남녀는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잘 알았다. 그 일을 끝내기 전에는 결혼이라는 형태로 구축된 사랑의 구조물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 나는 왜 그들이 완전한 이별과 영혼 속에 다운로드된 기억의 삭제로 그들의 결심과 합의를 완성해버렸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두 사람을 사랑했고 두 사람도 우리를 사랑했다. 우리는 자주 만나 그들의 사랑을 확인했다. 그 만남은 불같은 정열과 차가운 지성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즐겁고 유쾌했지만 한편 애처롭고 조마조마한 시간들이었다. 친구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착하고 말수 적은 아내를 맞았다. 여자 친구의 소식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끊어졌다. 이제 우리는 어쩌다 만날 수밖에 없게 됐다. 구릿한 입 냄새를 풍기는 중년돼 만난 우리는, 그러나 추억보다는 꿈을 말하려 든다. 세상 모든 사나이에겐 숨겨두고 싶은 추억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디 사나이뿐이랴.
비밀은 '공범'을 만든다. 친구와 나는 서로에게만은 절대 말하지 않는 비밀 아닌 비밀을 간직한 추억의 공범이다. 친구도 나도 친구들과 그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에게만은 하지 않는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아름다웠던 청춘의 시간에 장만해뒀던 헤아릴 수 없는 기억들을 꽤나 많이 시간의 강물에 풀어 보냈다. 이제는 굵은 알맹이들만 더러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을 막을 수는 없다. 흐르면 흐르는 대로 남길 것은 남기고 떠날 것은 망각의 바다로 떠나보낼 뿐이다. 얄궂어라! 남은 자가 나그네의 일기를 쓴다.

우리 내면의 해저에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기억은 거듭 쌓여 단층을 이루고 우리는 순간마다 영겁을 가로질러 한 시대의 기억 속을 여행한다.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채. 하지만 기억은 분명 우리 몸이 일부가 돼 짜릿한 쾌감과 아련한 슬픔을, 전기에 감전된 듯한 충격을 선물한다. 눈을 감고 떠올려 보라. 당신의 시간 어느 곳을 저며 그 절절한 정서를 돌이켜 보라.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던 정채봉처럼.

2016년 7월1일, 나는 '마라의 죽음과 생식기'라는 제목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남루한 조각배에 독자 여러분을 태우고 어디로 흘러갈지 알지 못한 채. 우리의 몸을 더듬어 때로는 은유로, 때로는 현실로 풀어낸 나의 이야기들, 추레한 나그네의 길이었다. 연재는 다음 주로 마친다. 우리는 이제 각자의 길을 가리라. 매 순간이 운명일 수밖에 없는 체험과 심연과도 같은 망각, 그리하여 영원의 지층으로 잠복하고야 말 온몸에 새긴 시간의 문신, 그 행간 속으로. 그때 고백했듯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문화부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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