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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오리엔트 특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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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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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마치고 부산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기차를 타고 귀향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부산에 정착한 이유를 나는 모른다. 나는 부산에서 사업을 일으켜 기반을 마련한 아버지가 서울로 터전을 옮긴 뒤에 세상의 빛을 보았다. 아버지 나이 마흔, 어머니 나이 서른여섯에 하나뿐인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서울 동대문구, 의정부와 청량리를 연결하는 철길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 아래 마을이었다.

비가 내리는 초가을 아침에 첫울음을 터뜨린 아이는, 아마도 기차의 기적소리와 철컥철컥 레일 위를 구르는 바퀴소리를 함께 들었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전, 부산에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한 어머니가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때, 어머니의 뱃속에 깃들인 나는 어머니의 눈을 빌려 빠르게 창밖을 스쳐가는 세상을 견학했을지 모른다.
그래서일 것이다. 기차는 언제나 나의 잠재의식 속을 달린다. 거기 먼 곳을 향한 나의 그리움을 실었다. 어린 시절,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나는 꿈을 자주 꾸었다. 대학을 마치고 기자가 되어 출장을 다닐 때, 비행기나 버스보다 기차를 애용했다. 부산에 갈 때는 새마을호를 탔다. 열차시간표로는 다섯 시간 남짓이었지만 연착이 잦아 여섯 시간 가까이 걸리기도 했다. 여섯 시간은 보통 시간이 아니다. 비행기로 그 시간이면 인천에서 싱가포르(!)까지 간다.

지난 1월 17일. 도쿄에서 서울로 출장 온 일본 기자와 충무로에서 삼겹살을 먹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라는 영화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해서, 1974년에 나온 오리지널 버전과 2010년에 나온 TV 버전, 심지어 2015년에 나온 일본 후지TV 버전까지 다 보았다. 나는 20년 넘게 사귄 일본 친구와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후지TV 버전은 참 잘 만들었더라. 너희는 우리보다 땅이 넓어서 그런 영화를 찍을 수 있구나. 우리는 2박3일이나 걸리는 기차노선이 있어야 말이지."
하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그 친구가 나를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남북 화해가 열매를 맺어 끊긴 철로를 잇기만 하면 우리도 유라시아 대륙 어느 곳이든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다. 2박3일? 아무것도 아니다. 1936년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생은 꼬박 열사흘 걸려 베를린에 갔다.

분단은 우리에게서 수평선 너머를 볼 수 있는 시력을 앗아갔다. 휴전선은 세상의 끝, 낭떠러지였다. 우리는 섬에 갇혀 살아남아야 하는 로빈슨 크루소가 되었다. 휴전선을 열어 끊긴 철길을 잇는 일은 우리에게 한반도를 벗어나 대륙의 저편을 바라보는 비전을 선물한다. 그러기에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과 지난 12일 북미회담은 속도를 더해가는 기관차 엔진처럼 나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길이 열리면 가장 먼저 아버지의 고향에 가겠다.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황곡리. 명천 역에서 5㎞, 신명천 역에서는 2㎞ 남짓 떨어진 곳이다. 길주에서 15㎞만 더 달리면 나온다. 나는 요즘 이명(耳鳴)을 앓는다. 레일 위를 질주하는 기차의 바퀴소리가 쉴 새 없이 나의 귀를 울린다. 이 울림을 따라 나의 피가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곳에 터전을 이룬 먼 조상의 맥박으로 이어진다. 나의 귀는 그 근원의 소리를 듣는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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