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고쳐 써가며 옆구리 면에 쓰여진 안내판을 열심히 읽던 B는 “경의선이라고 하길래 의정부 가는 길 인줄 알았더니 신의주네!”라고 하면서 탄식어를 내뱉는다. 7080세대인지라 휴전선 이남의 지명으로 국한된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는 지정학적 한계 속에서 살아왔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3명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신세대는 ‘연트럴파크’라고 부른다. 연남동과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합했다. 북쪽이 막혀 있으니 아예 동쪽으로 태평양을 날아다닌 경험치가 쌓인 결과일 것이다. 없어진 철길의 이미지도 그 이름과 함께 사라졌다. 너무 ‘나가버린’ 네이밍이긴 하지만 톡톡 튀는 동서 문자의 조합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어린아이와 반려견의 행복한 나들이 표정을 바라보며 우리일행도 넓은 소맷자락으로 바람소리를 내며 운동 삼아 씩씩하게 걸었다. 공원 마지막 좁은 길을 따라 오르니 길 끝의 고가도로 다리 아래 펴놓은 서너 개의 평상에는 해방세대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몇 개의 바둑판을 마주한 채 삼매에 빠져있다. 그 뒤로 멀리서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하고 모자를 눌러쓴 채 굳은 표정으로 공원방향을 향해 재빠른 걸음으로 오는 남정네와 눈길이 마주치기도 했다.
기술에 따라 철길도 그 모양을 달리하기 마련이다. 터널 뚫기와 다리세우기 실력이 모자라던 시절에는 산과 강의 지형에 순응하는 곡선철길이 많았다. 세태가 바뀌면서 ‘빨리빨리’를 외치는 주변의 요구에 따라 여기저기 부분적으로 직선화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폐철로가 생기면서 고철로 뜯겨 팔리거나 대장간으로 갔고 폐침목은 교외에 새로 짓는 별장의 가파른 언덕길 계단으로 전용되기도 했다. 교통량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왕복노선을 달리한 복선화도 이루어졌다. 넓어지는 철길에 반비례하며 승객과 화물의 수요가 작은 역에는 열차의 정지횟수가 차츰차츰 줄었다.
길은 필요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며 또 넓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용도가 폐기된 채 을씨년스럽게 버려진다. 반대로 없어지다시피 한 토끼길, 나무꾼길, 과거시험 보려가는 길, 임금님 행차길 등 묵은 옛길을 살려 다시 둘레길로 정비되었다. 예전에 편의를 위하여 덮었던 시멘트 포장을 걷어내고 다시 흙길로 복원하기도 한다. 이처럼 길도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 만들고 이용하고 수리하고 교체되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순환법칙을 따라 생기고 유지하고 없어짐을 반복하는 것이다. “본래 길은 없다. 내가 가면 길이 된다.”고 호기 있게 외치는 사람도 있지만 본래 있던 길도 없어진다는 사실도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원철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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