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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86]한옥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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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라서, 학생들과 이런 대화를 자주 하게 됩니다. "집이 어딘가?" "서울입니다." "서울 어디?" "불광동입니다." "거기서 나고 자랐나?" "네. 저는 서울 토박입니다." "부모님은?" "아버지는 전라도 광주 출신, 어머니는 부산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서울 토박이는 아닐세." 학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선생을 봅니다.

선생의 설명이 제법 길어집니다. "토박이는 그 땅에서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네. 한곳에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집안의 자손을 일컫지. 토종닭이나 개 혹은 토박이 식물을 생각해보게. 외국에서 씨를 들여다 이땅에서 키우고 가꿨대서, 그 꽃을 우리 화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에이. 그럼 서울 토박이가 얼마나 되겠어요?"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이어갑니다. "당연히 많지 않지. 어느 조사 통계를 보니, 4.9%. 생각보다 훨씬 더 적더군. 서울시민 스무 명 중에 한 사람 꼴이라는 얘기지. 하지만 그게 맞을 거야. 토박이 축에 들려면, 한일합방 이전부터 한성부(漢城府) 사람이었어야 한다니까."

적어도 삼대 이상, 그것도 '사대문 안' 사람들이라야 서울토박이라고 부른다는 말입니다. 범위를 한껏 넓혀봐야, '한양도성 십리 근방'(城底十里)에 살던 사람들까지 넣어주는 게 고작이랍니다. 임금 무릎 밑에 살던 이들과 성벽 그늘 아래 백성들의 묵시적 합의에서 비롯된 관념일 테지요.

양성모음(陽性母音)보다는 음성모음을 즐겨 쓰기 때문인지, 서울말은 대체적으로 부드럽고 온순한 인상입니다. 삼촌을 '삼춘'으로, 돈을 '둔'이라 했습니다. '여보세요'가 '여부세요'에 가깝게 들립니다. '~같아'를 '같어'라 했습니다. 지금 몇 시인지 물으려는 아이가 '아이씨!' 하면서, 시계 찬 아저씨를 불러 세웠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전학 온 촌뜨기, 제 기억에도 퍽 많은 말들이 남아있습니다. 서울은 의사 선생을 '으사 선생', 계란을 '겨란'이라 말하는 도시였습니다. 가장자리는 '가생이'라고 하고, '~허우', '~허시우' 같은 말투가 흔했습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가 그러지 않던가요. "아저씨는 겨란 안 좋아 허우?"

지금 제 귀엔, 옥희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방 아저씨 목소리가 쟁쟁 울립니다. 이 댁 부인네가 서울말, 서울 억양으로 인사를 건네올 것만 같습니다. "뉘시우? … 어딜 찾아 오셨에요?" 주인 허락도 없이 남의 집 툇마루에 와 앉아, 홍매화에 취해있는 까닭입니다. 남산골 한옥마을, 김춘영 씨댁 '개와(기와)'집입니다.

김 씨는 구한말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사람입니다. 삼청동 그의 집이 여기 와 앉아 있습니다. 우두머리 목수 집부터 '황후' 큰아버지가 살던 집까지 조선 민가 여러 채가 모인 곳입니다. 모두, 시절의 인연을 따라 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집의 운명이 조금 더 기묘하게 느껴집니다.

'오위장'이라면, 도성 안팎을 순찰하고 궁궐의 안위를 책임지던 직책입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서울 경비를 맡은 부대의 고급장교지요. 이 자리에 있던 군인들과 콘크리트 막사와 연병장이 떠오릅니다. 30여 년간(1961-1991) 서울을 지킨 부대였습니다.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입니다.

이 마을(규모와 구색을 생각하면, 좀 멋쩍은 이름이지만)이 올봄에는 더 각별한 생각을 불러옵니다. 무기고 화약고의 골짜기에서 아름다운 옛집을 만납니다. 남산 자락에서 삼현육각(三絃六角), 우리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 국악당을 앉힌 것은 잘한 일입니다. 덕분에, 이 마을이 평균적인 관광지의 차원을 훌쩍 넘어섭니다.

어쨌거나 헛기침 소리가 나던 지붕 밑을, '내 집처럼' 들락거리며 조선과 한양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한옥을 보는 즐거움은 조선 톱과 대팻날의 공력, 목수의 눈썰미를 생각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는 데에 있지요. 거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면 사극(史劇)의 '미장센'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민 씨 댁 뒷마당에서, 곧 피어날 배꽃을 그려봅니다. 이조년(李兆年)의 시조가 그리는 정경입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하는 삼경(三更)인데/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보고 싶은 장면입니다. 바라건대, 그런 밤에는 문 닫는 시간을 더 늦추면 좋겠습니다.

배꽃과 달빛이 서로 홀린 밤, 국악당에서는 '정가(正歌)'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어느 봄밤이 부럽겠습니까. 고향의 달밤처럼 황홀할 것입니다. 서울 사람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여기 와 있던 것이 어디 있습니까. 동서남북 사방에서 옮겨온 집들입니다. 팔도에서 모여든 꽃과 나무들입니다.

바람은 산을 넘어왔고, 구름은 강을 건너왔습니다. 제 학생에게도 다시 가르쳐야겠습니다. "딛고 선 땅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는 사람, 그는 토박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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