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고등학교 3학년 강용주는 총을 든 채 전남도청 앞에 서 있었다. 5월 27일 새벽, 도청이 계엄군에게 함락되고 시민군이 체포되어 손들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그는 겁에 질려 도망쳤다. 그는 오래도록 죄책감에 시달렸고, 방황 끝에 의대에 진학했다. 피 흘리며 쓰러진 시민들을 치료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헌신성에 감동 받은 것이었다. 그는 불의한 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피 끓는 젊은이의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85년,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는 모진 고문 끝에 그를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의 일원으로 조작했고, 법원은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나는 1998년 MBC <화제집중> ‘어머니의 보랏빛 수건’ 편에서 강용주의 어머니 조순선 여사를 인터뷰하고,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집회를 취재해서 몇 차례 방송한 적이 있다. 석방된 그는 이런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잘 해 주었다.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어머니 곁에 잠깐 있어 드린 게 그렇게 고마운 모양이었다. 대단한 투사일 줄 알았던 그는 담백하고 유쾌한 청년으로 우리 PD들을 쥐락펴락 웃기고 울렸다. “저 억울해요, 유럽하고 미국 가 본 적도 없는데 구미유학생 간첩이래요.” 그는 23살 어린 나이에 ‘전향공작’에 시달렸고, 수없이 끌려가서 맞았고, 수갑 채워진 채로 징벌방에 갇혔다. 어떤 교도관은 ‘빨갱이’라며 침을 뱉기도 했다. 이런 모욕을 견뎌낸 이유는 단순했다. 저열한 폭력에 굴복할 수 없는 자신의 존엄성 때문이었다.
강용주는 38살 늦은 나이에 의대에 복학, 어린 후배들 틈에서 공부를 마치고 가정의학 전문의가 됐다. 어머니는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리 밤중이라도 병원 문 두드리는 사람 있으면 열어주어라. 아무리 먼 곳이라도 너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가거라. 아무리 돈 없는 사람이라도 아프다면 꼭 치료해 주어라.” 그는 재단법인 <진실의힘>에서 억울한 조작간첩 피해자들의 재활과 치유를 도왔고, 세월호 유족들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비롯한 이 시대 상처 입은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데도 열심이었다.
어제, 2018년 2월 21일, 강용주의 보안관찰법 위반에 대해 드디어 무죄 판결이 나왔다. 다만 재판부는 보안관찰법 제도 자체의 위헌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강용주가 간첩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안다. 그가 ‘재범’의 위험이 없다는 사실도 누구나 다 안다. 상식에 어울리는 이 판결을 얻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와야 했는지…. 이제 국가는 강용주를 자유롭게 내버려 둬야 한다. 그 동안 강용주에게 가한 고통에 대해 사과하고 배상해야 정의가 바로 설 것이다. 국가폭력 피해자를 이중으로 괴롭히는 보안관찰법이야말로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시대의 적폐 아닐까.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 MBC 해직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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