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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의 事와 史] '독서국민' 탄생의 경험이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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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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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에는 범람하는 인쇄물들로 인해 사회지도층에서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그들의 위기의식은 요즘과는 정반대로 독서량이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독서 과잉’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의 식자층은 독서가 지나치게 보편화하는 것을 우려했다.

특히 하층민의 독서량 증가가 가져올 위험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자유주의의 비조(鼻祖)로 알려진 존 로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반대했다. 식자우환(識字憂患), 글을 알아봤자 자신의 한탄스런 처지를 비관하게 될 뿐이기 때문이었다. ‘무지’는 자비로운 신이 하층민의 비참함을 덜어주기 위해 내려주신 아편이었다.
또한 지나친 독서는 마치 오늘날 지나친 텔레비전 시청이 일종의 문화적 해악으로 여겨지는 것과 흡사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독서량의 급증을 개탄하는 사람들은 독서가 공중보건을 해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18세기말의 한 기록은, 과도한 독서로 인한 신체적 이상으로 감기, 두통, 시력감퇴, 발진, 구토, 관절염, 빈혈, 현기증, 뇌일혈, 폐질환, 소화 장애, 변비, 우울증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인의 독서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1800년경에 이르러 서유럽인들은 대단히 집중적으로 독서를 하고 있었고, 이러한 책 읽기와 출판의 광범한 증가 속에 서유럽은 독서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1400년대 중반 구텐베르크에 의해 출발한 활자문화가 이 시기에 절정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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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후발주자로서 근대화에 뛰어든 일본의 경우도 살펴보자. 나가미네 시게토시의 <독서 국민의 탄생>(푸른역사)은 메이지 시대(1868~1912) 일본이 활자 미디어를 읽는 습관이 몸에 밴 ‘독서 국민’으로 탄생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메이지 초기 사람들의 탈것 가운데 가장 친근한 것은 인력거였다. 당시 도로 사정은 극히 나빴다. 게다가 나무 테에 철판을 덧씌운 인력거 바퀴는 진동이 심했다. 승차감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력거를 새로운 독서의 장으로 활용했다.

인력거라는 차내 공간은 승객 1, 2명과 인력거꾼으로 이루어진 닫힌 공간이다. 메이지 초기 일본인의 독서 방식은 음독(音讀)이었으므로 승객이 신문을 읽으면 듣는 사람은 인력거꾼이다. 인력거꾼 중에는 승객에게 읽어주기를 적극적으로 부탁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손님이 읽는 것을 귀로 들으면서 끌고 가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끌고 가는 도중 질문하고, 이해가 되면 정중히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식이었다.
인력거꾼은 최하층민이 먹고 살기 위해 흘러 들어가는 막장과도 같은 직업이었다. 하지만 당시 기록을 보면 사회 최하층인 인력거꾼마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신문잡지를 일상적으로 읽을 정도로 독서 습관이 모든 일본 국민의 몸에 배어 있었다는 증언이 나온다.

메이지 5년(1872)에 처음 개통되어 메이지 20~30년대에 전국으로 확대된 철도는 일본 국민의 독서의 장으로 십분 활용됐다. 문제는 전통적 음독 습관이었다. 기차 안에서 음독을 하면 주변 사람에게 방해가 된다. 승객 중에 외설적인 글을 큰소리로 읽어 사람들을 배꼽 빠지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음독은 공공성의 논리에 막혀 사라지고 새로운 독서법인 묵독(?讀)이 정착되기에 이른다.

서유럽은 18세기에, 일본은 19세기에 독서 국민으로 탄생했다. 독서와 관련된 서양과 일본의 역사적 경험은 우리와 여러 모로 비교된다. 18세기와 19세기에 각기 황금기를 누렸던 서양이나 일본과는 달리, 우리는 일제 지배를 벗어난 20세기 중반 이후 비로소 본격적인 모국어 독서문화를 ‘시작’했다. 독서문화가 시작된 지 1세기도 되지 않은 독서 신생국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우리에겐 ‘독서 국민’ 탄생의 경험이 없다.

20세기 중반 간신히 싹을 틔웠다가 힘없이 시들어가던 우리의 독서문화는 20세기말부터 밀어닥친 전자문화로 그야말로 고사(枯死) 위기에 직면했다. 얼마 전 국내 제2의 도매업체 송인서적이 부도 사태를 맞이한 근본원인도 따지고 보면 독서문화의 소멸에 기인한 것이다. 갈수록 독서량이 줄어드는 세태 때문이다. 디지털 이미지 시대로 세상이 바뀌었으니 종이책 위기 따위는 별 문제 아니라는 식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 역사에는 월반(越班)이 없다. 종이책 시대에 정점을 찍어보지 못했던 우리의 과거가 21세기 한국 사회의 미래에 어떤 그늘을 드리우게 될지 염려된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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