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시부터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의 뇌에는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고 싶은 욕망이 내재돼 있다. 다행히 공존을 위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인간은 서로의 이기심을 견제하고 조율하면서 산다. 하지만 극단적 이기심에 사로잡혀 타인을 해치는 가해자의 횡포, 그리고 피해자들의 원한 맺힌 복수전은 지구촌 곳곳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횟수가 거듭될수록 피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일단 피해자가 발생했을 땐 가해자가 신속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적절한 보상’을 통해 피해자의 용서를 구하는 시스템이 작동돼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객관적이고 공정한 원칙을 담은 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요약되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다. 이 법에 의하면 아무리 억울한 피해자라도 자신이 입은 피해만큼만 가해자에게 되갚아 줄 수 있다. 예컨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처럼 회의 석상에서 졸거나 불량한 자세를 취한 고위층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일은 자행될 수 없다. 동태복수법이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잔인한 듯 보이지만 역사적으로 복수의 ‘제한성’을 둔 정의의 법으로 불리는 이유다.
현대 사회에서는 공공기간이 피해자에게 발생한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판단한 뒤 가해자에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해결책을 요구하고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 법원, 국제인권사면위원회 등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기관이다.
대한민국 외교부는 일제 치하에서 위안부로 끌려간 피해 할머니들 입장에서 가해자인 일본으로부터 진정성 있는 사과와 법적인 배상문제를 받아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기관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피해 할머니들 몰래 일본과 한·일위안부합의를 진행한 뒤 그 결과를 2015년 12월28일에 발표했다. 당연히 피해 할머니들과 국민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민심을 몰라라 한 채 지난 해에는 위안부 문제 관련 예산을 삭감했고 유네스코 기록물 등재 사업도 중단됐다.
그러더니 지난 24일, 윤병세 외교장관은 부산시청과 동구청에 ‘일본 총영사관 앞 소녀상을 이전하라’는 내용의 공문까지 보냈다. 그러자 일본은 “긍정적이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건 한·일 합의 이행”이라면서 “한국 측의 대응이 미흡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소녀상을 옮길 게 아니라 대한민국 외교부를 일본으로 옮겨야 할 판”이라는 통탄의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일제 치하에서 성노예로 끌려갔던 10대 소녀들의 ‘귀향’은 고통과 치욕의 삶에서 살아남은 조선의 딸들이 고향 땅을 밟게 됐다는 슬픈 이야기로 끝나서는 안 된다. 생지옥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지켜냈던 그들의 생명은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소녀들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을 폭로하고 위안부 제도를 지구촌에서 영구 추방하는 생생한 증거로 남아야 한다. 소녀상은 단순한 동상이 아니며 성노예로 끌려갔던 이 땅의 소녀들이 역사적으로 부활했음을 상징하는 징표다.
98주년 3·1절이 내일로 다가왔다.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를 외쳤던 선조들이 하늘나라에서 위안부 할머니와 소녀상을 향해 편안한 위로의 눈길을 보낼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쯤일까.
황세희 국립의료원 공공보건연구소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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