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2세의 아버지 찰스 1세(1625~49 재위)는 청교도혁명 와중에 의회파에 패한 후 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649년 1월30일 찰스는 참수형을 당했다. 그러나 마지막 며칠간 찰스가 보여준 위엄과 기품은 오히려 처형한 사람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영국 왕들 중 가장 불성실했던 인물임에도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위엄 덕분에 순교자로 각인되었다.
찰스 1세가 참수형 당하자 두 아들 찰스(찰스 2세)와 제임스(제임스 2세)는 외가(外家)인 프랑스로 망명해 루이 14세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국왕이 소멸한 공화정은 영국민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호국경이라는 이름으로 공화국을 지배한 청교도혁명 지도자 크롬웰이 죽자, 영국민은 처형당한 찰스 1세의 아들을 떠올렸다. 마침내 1660년 찰스 1세의 장남이 국민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찰스 2세(1660~85 재위)였다. 크롬웰은 부관참시 되었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찰스 2세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고 1685년 죽었다. 19세에 부왕을 비참하게 여의었고, 중년에는 유럽 대륙을 떠돌았으며, 말년에는 자식 하나 남기지 못했다. 그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는 어릴 적부터 참수형 당한 부친 찰스 1세를 닮아 종교에 열정적이었고, 가톨릭 신자였던 모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청교도혁명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에 머물면서 가톨릭 문화에 더욱 친숙해졌다.
국왕은 이듬해인 1688년 5월 ‘관용령’을 재공포했다. 국교회의 특권에 대한 침해였지만 그래도 국교도들은 잠자코 있었다. 왕은 연로했고(당시 55세), 그가 죽으면 네덜란드에 시집간 개신교도 딸 메리가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6월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결혼한 지 10년 넘게 자식을 갖지 못했던 왕비에게서 왕자가 태어난 것이다. 왕자는 필시 가톨릭교도 어머니 아래 가톨릭교도로 양육될 것이고, 그러면 앞으로 가톨릭교도 국왕의 치세가 계속 이어질 것이었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의회는 1688년 6월말 네덜란드의 빌렘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제임스 2세의 사위인 빌렘은 그 해 11월에 1만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상륙했다. 국왕은 이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제임스에게는 사위보다 훨씬 많은 상비군이 있었지만, 군의 사기는 떨어져 있었고 지휘관들은 국왕을 위해 싸울 의지가 없었다. 군사령관을 포함 수백 명 장교들이 빌렘 편에 가담했다. 국민 대부분도 그 뒤를 따랐다. 제임스는 프랑스로 도망쳤다. 그는 바다에 옥새를 던지는 것으로 소심한 분풀이를 했다. 이로써 피를 흘리지 않은 혁명, 즉 명예혁명이 완성되었다.
5%의 지지율로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박근혜 정부가 시간을 끌며 국민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 제임스 2세는 처형당한 왕의 아들로서 민의에 어긋난 종교정책을 펴다가 쫓겨났다. 암살당한 아버지 후광으로 대통령이 된 딸은 ‘비선실세’에 의존해 헌정질서를 유린하다가 국민의 지지를 잃었다. 두 사람은 오만, 편협, 무능 등에서도 공통점이 많다. 압도적인 국민의 힘으로 명예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나라는 정상국가로 서지 못할 것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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