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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와 史] 노동을 천시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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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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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3일, 베를린올림픽(1936)에 출전할 일본 마라톤 대표선수 선발전이 도쿄에서 열렸다. 손기정 선수는 2시간 26분 42초라는 세계최고기록으로 뽑혔다. 그해 말 손기정 선수의 국가대표 선발 축하연이 서울 명월관에서 열렸다. 미국 선교사이자 경신(儆新) 학교장인 게일(James S. Gale, 1863~1937) 목사가 축사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양 사람들이 정구(테니스) 하는 걸 보고서는 ‘왜 힘든 일을 하인에게 시키지 않느냐’던 조선 땅에서 오늘 이렇게 훌륭한 마라톤 우승자를 키워냈다. 손기정 군의 우승을 보니 조선 사람들의 의식도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
게일 목사의 말처럼 전통적으로 한국인은 몸 쓰는 일을 천하게 여겼다. 운동마저도 하인이 할 일로 여겼으니, 육체노동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 역사에서 노동신성(勞動神聖) 이념은 뿌리를 내린 적이 없었다.

로마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역사학자들은 로마제국 멸망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노예제와 인력부족에 기인한 농업생산성의 저하를 꼽는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117)까지만 해도 로마는 정복 전쟁으로 노예 인력을 공급함으로써 노예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로마는 극심한 인력난에 빠졌다. 정복 전쟁이 중단되자 노예 공급이 중단된 것이다. 농산물 수확이 감소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농업 기술이 발전되지 않은 것도 노예제 탓이었다. 세계사 어느 시대를 봐도 농업생산성 향상은 기술 혁신의 결과였다. 그러나 로마의 지주들은 기술 문제에 관심 갖는 것이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라 여겼다. 일할 수 있는 노예 노동력이 존재하는 한 노동력 절감에 무관심했고, 기계 장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천박함의 표시로 여겨졌다. 이렇듯 지주들이 ‘고상한 일’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동안 로마 경제는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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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제국은 476년 멸망한다. 그 후 6세기에 등장한 베네딕투스(베네딕도) 수도회는 육체노동에 대한 서양 사회의 고정관념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귀족의 최고 이상은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여가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베네딕투스 수도회 창립자인 베네딕투스(480-547)는 수도사들에게 항상 바삐 일할 것을 권했다.
그는 ‘게으름이야말로 영혼의 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수도사들이 일정 시간 동안 육체노동에 종사하도록 규칙을 정했는데, 고대 그리스·로마의 귀족이나 철학자들이 이 규칙을 접했더라면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노동신성 이념이 탄생한 것이다.

초기 베네딕투스 수도사들은 그들 스스로 열심히 노동을 했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노동의 존귀함에 관한 이념을 확산시켜 나갔다.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활동에 힘입어 노동신성 이념은 서양 문화와 전통의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베네딕투스 수도사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소젖을 짜고, 타작을 하고, 쟁기질을 하고, 망치질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수도원에 번영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베네딕투스 수도원들은 특히 농업 방면에서, 나중에는 영지 경영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 서유럽의 경제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농업만이 아니다. 그들은 고전을 베껴 쓰는 필사본(manuscript) 제작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고전 문헌 보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 추진력을 제공한 인물은 로마의 정치가이자 수도원 설립자인 카시오도루스(477-570)였다. 카시오도루스는 고전을 필사(筆寫)한다는 것 자체가 ‘육체노동’(manual labor, 손으로 하는 노동)이며, 그것이 농업노동 못지않게 수도사들에게 적합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카시오도루스의 사상에 공감한 베네딕투스 수도원들은 수백 년간에 걸쳐 고전 교육 및 필사의 유일한 중심지가 되었다. 중세 초기 수도사들이 필사 작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고전 라틴 문헌들은 오늘날 한 편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으로부터 80년이 지났다. 스포츠에 대한 인식은 변했지만, 육체노동을 하찮게 보는 전통은 여전하다. 폭염이 기승을 부린 지난 8월6일 CJ대한통운 택배기사 안 모씨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극악한 노동 조건에서 과로한 때문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온몸을 던져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소방관들의 모습도 어른거린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에 대한 존중과 정당한 대접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박상익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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