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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찬칼럼]'잠깐만요' 대통령의 몸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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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찬 논설실장

양재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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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주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감기몸살 때문이었다. 첫날 네덜란드 국왕 주최 만찬에 불참했다. 이튿날 오전 회의에는 참석했는데 오한이 겹쳐 오후 일정은 포기했다. 업무오찬, 본회의, 폐회식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면담까지. 링거주사를 맞으며 휴식을 취하다 저녁 한ㆍ미ㆍ일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무리한 강행군이 화근이었다. 대통령은 23일 오후 헤이그에 도착해 곧바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그때가 한국 시각으로 새벽 4시,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 피곤한데도 쉴 틈이 없었다. 한ㆍ미ㆍ일 정상회담 이전에 시 주석을 만나야 했다. 시차 적응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대통령의 강행군은 20일 규제개혁회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후 2시부터 7시간 넘게 회의를 주재했다. 민간인 참석자의 질문에 장관들이 답변하는 중간 중간 '잠깐만요'하며 끼어들어 꼬치꼬치 따지고 물었다. 정부인증 절차를 확인하는 전화 '1381'을 국민이 얼마나 아는지부터 문화재와 학교 인근에 호텔이 왜 못 들어서는지까지 전부 챙겼다.

성과는 몇 가지 있었다. 9년 째 끌어오던 푸드트럭 개조가 허용될 모양이다. 뷔페식당에 반경 5㎞ 이내 제과점 빵만 사도록 한 규제도 풀린다. 불합리한 규제야 풀어 마땅하지만 문제는 그 처리 방식이다. 대통령이 관여하고 지시해야 해결되면 민원인들이 청와대로 몰릴 것이다. 그에 반비례해 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나 각 부처의 위상과 기능은 오그라들고. 대통령이 규제를 쳐부술 원수라며 몰아붙이자 필요성과 당위성이 큰, 좋은 규제까지 수술해야 할 암덩어리로 인식되는 터다.

매사에 청와대가 나서면 대통령은 너무 피곤하고, 장관들은 무책임해진다. 이번 규제개혁회의도 총리실과 각 부처가 철저히 준비해 대통령에게 퇴자 맞지 않고 원래 일정대로 17일 진행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대통령이 해외순방 길에 연설문 독회 등으로 잠을 못자 피로가 쌓여 감기몸살에 걸리진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규제개혁회의는 총리가 주관하라. 대통령은 참석해도 규제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도면 족하다.
연초 기자회견에서 어느 기자가 물었다. 업무 끝나고 관저로 돌아가면 뭐 하시냐고. 대통령은 보고서 읽는 시간이 가장 많고 개인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다고 했다. 밤늦게까지 보고서를 읽다가 장관이나 담당 국ㆍ과장에게 전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자 대통령에게 전화올지 모른다며 저녁식사한 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고위 공직자도 등장했다.

대통령이 시시콜콜 지시하고 장관과 청와대 수석들이 토론이나 반론 없이 받아쓰는 회의 장면은 박근혜정부에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대통령 지시사항을 이행하기 바쁜 하향식 국정운영 방식으론 '창조경제'는커녕 '모방경제'도 힘들다. 발표한 지 일주일도 못 간 전월세 임대소득 과세 후퇴 소동에서 보듯 조세ㆍ주택ㆍ교육 정책이 우왕좌왕하는 것도 '받아쓰기 눈치행정'의 산물이다.

대통령은 충분히 휴식해야 한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숱한 국정을 대통령 혼자 할 수는 없다. 총리와 장관이 소신껏 일하도록 하라. 미덥지 않으면 과감히 바꾸고. 선거 때 책임 총리ㆍ장관제를 공약하지 않았던가. 대통령 스스로 직접 챙길 일과 장관에게 맡길 일을 구분해야 한다. 규제개혁과 경제 문제 등 나라 안 일은 총리와 경제부총리, 장관들이 책임지고 하도록 맡기자. 대신 남북문제와 한일관계, 동북아 평화질서 유지 등 나라 밖 일은 대통령이 고민하고 진두지휘해야 한다. 대통령이 장관이나 국장급 공무원이 할 소소한 일까지 신경 쓰느라 큰 생각에 큰 그림을 못 그리면 본인에게도, 국가적으로도 불행이다.





양재찬 논설실장 jaya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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