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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수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도토리 이야기

최종수정 2020.10.14 17:41 기사입력 2020.10.1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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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수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도토리 이야기

딸아이는 어릴 적부터 대가족 속에서 할머니들이 키워주셨다. 나에게는 할머니, 딸아이에게는 증조할머니가 계셨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계셨다. 동네에는 친구분들까지 딸아이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였으니 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이름이었다. 최씨 어른. 철수 아버지, 영희 엄마, 울산댁등 지역이나 성씨, 자녀들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일반적인 이름이 대신 홍길동 할아버지, 김말순 할머니처럼 어르신들의 이름을 정확히 칭해 할머니, 할아버지를 구분했다. 딸아이 덕분에 몇십 년 동안 잊고 지내던 이름을 찾게 되어 좋아 하셨고 오래동안 이웃이고 친척이었지만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고 서로들 부끄러워하셨다.


이름을 찾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이시면 딸아이는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자리를 마련한다. 이야기는 광복 전으로로 올라가고 6.25 전쟁을 지나 월남전쟁과 일하러 간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래 바람까지 나와야 끝이 나고 보릿고개를 지나 개떡과 주먹밥, 시래기죽을 먹어야 완전히 끝이 난다. 기특하게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듣고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아이와 함께 들었던 그 어르신들의 이야기 중에는 요리하는 나에게는 전공서적에서도 볼 수 없는 귀한 이야기들도 많다.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가을 이야기는 도토리이다. 도토리는 옛날부터 가을이 되면 도토리를 모아 가루를 만들었다. 단단한 도토리껍질을 하나하나 쪼개고 물에 담가 속껍질을 벗겨내어 갈아서 녹말을 가라앉힌다. 가라앉은 녹말 위에 뜬 떫은 물은 따라 버리고 도토리녹말을 말려 가루를 만든다. 보관한 도토리가루는 다른 묵가루에 비해 오래 오래 끓여야 그 맛이 더 탱탱하고 좋다. 도토리가루로 쑨 묵이 지금은 별미 음식이 되었지만 먹을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번거롭지만 가을에 준비해둔 도토리가루가 구황작물이 되기도 했다. 또 가을에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로 올해 농사가 어떨지 판단하기도 하셨다는데 풍년이 드는 해에는 도토리를 보기 힘들고 흉년이 든 해에는 도토리가 풍성하다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들려주셨단다.


올해는 도토리가 풍성한 걸 보니 풍년은 아닌 것 같다며 지난 장마와 태풍으로 가을을 풍성하게 해주는 고구마, 깨, 콩 등이 알이 하나도 차지 않았다고 그때 할아버지의 말씀이 맞는 것 같다고 하신다.

풍년이 들지 않았으니 도토리로 비상식량을 마련하도록 한 고마운 자연의 이치일까?

풍년이 들어 도토리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의 여유로움이었을까?

이유가 무엇이든 매번 듣는 옛날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아주 들리는 법은 없었다.

풍성한 도토리를 올해는 다람쥐들에게 양보하고 조금만 모아 도토리묵 가루를 만들어야겠다.



글=요리연구가 이미경(http://blog.naver.com/poutian), 사진=네츄르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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