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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 케냐로 갔던 英돼지, 바이러스로 돌아와

최종수정 2019.10.23 14:36 기사입력 2019.10.2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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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FV 치사율 100% 고병원성 바이러스…염기서열 20만여개 백신개발 어려워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 따라 이동…19세기 말 아프리카 케냐에 돼지 공급뒤 발생
항공기 기내식품 타고 유럽 전파…인류의 오만과 욕심이 부른 살풍경일 수도

김병민

김병민

경기 파주시에는 임진강을 끼고 북쪽으로 뻗은 자유로가 있습니다. 어느 날 업무로 이 도로를 지나다 목적지로 가기 위해 다른 길로 빠지자 앞선 자동차들이 오도 가도 못 하고 길게 줄을 서 있더군요. 먼발치에서 방역 소독으로 하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차 유리창에 알 수 없는 화학물질을 뿌렸고 액체가 흘러내린 흐릿한 창밖으로 흰색 패널 위에 붉은색 글씨의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방역작업'이란 문구가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AI)처럼 조만간 이 상황이 진화되고 일상으로 돌아갈 거라 기대하고 있죠. 물론 아프리카돼지열병바이러스(ASFV)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미미한 증상을 일으키는 유형도 있다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온 바이러스는 치사율이 높은 고병원성 바이러스입니다.


과학에서는 될 수 있으면 100%라는 완벽한 수치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번 유형은 감염되면 예외 없이 전부 사망하기에 100%를 씁니다. 그래서 돼지사육농가의 긴장감은 이전과 사뭇 다릅니다.


ASFV가 왜 이리 지독할까요. 2009년 유행한 신종플루를 기억할 겁니다. 당시 면역력이 강한 젊은 사람들이 꽤 희생됐죠. 신종플루는 대상 세포가 면역세포였습니다. 면역세포는 외부 침입자를 발견하면 세포 간 신호를 보내 항체를 생산하거나 감염된 세포가 자살하게 합니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면역세포 간 통신 기능을 교란하고 자연적 사멸 기능도 방해합니다. 숙주를 살려야 자신이 번식할 수 있기 때문이죠.


통신의 매개는 전기신호가 아닌 단백질입니다. 이 단백질 이름을 따와 숙주의 과도한 면역 반응을 일으킨다고 해서 '사이토카인 폭풍(cytokine storm)'이라 불렀죠. 말 그대로 방어 체계가 좋은 숙주가 도리어 불리합니다. 이 폭풍으로 건강하던 사람들도 희생됐습니다.

그런데 ASFV도 신종플루와 비슷한 행동을 합니다. 말 그대로 돼지 생태계에 폭풍이 부는 거죠. 그렇다면 조속히 백신을 만들면 되지 않냐고 합니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ASFV는 염기 서열이 20만개에 가깝고 유전자 개수도 160개가 넘는 큰 바이러스입니다. 유전체가 많으면 변종이 많아 백신 제조가 어려울뿐더러 대형 바이러스가 어떤 수용체를 인식해 세포에 붙는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바이러스가 세포에 달라붙는 걸 방해하는 방법의 치료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는 현재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의 확산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방역이다. ASF 바이러스는 저온에도 강해 숙주인 돼지가 죽은 후에도 생존이 가능할 정도다. 가공식품에서도 수개월 이상 감염력이 유지된다. 사진은 지난 11일 경기 연천군과 강원 철원군의 경계인 3번 국도에서 방역 당국이 ASF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차량 소독 작업 중인 장면이다.  [사진= 연합뉴스 제공]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는 현재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의 확산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방역이다. ASF 바이러스는 저온에도 강해 숙주인 돼지가 죽은 후에도 생존이 가능할 정도다. 가공식품에서도 수개월 이상 감염력이 유지된다. 사진은 지난 11일 경기 연천군과 강원 철원군의 경계인 3번 국도에서 방역 당국이 ASF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차량 소독 작업 중인 장면이다. [사진= 연합뉴스 제공]


물론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에 사는 혹멧돼지를 포함한 3종류의 멧돼지 속은 이 바이러스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미 풍토병이 되어 숙주의 단백질이 바이러스가 방어 작용을 회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백질과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앞으로 연구의 핵심 방안이 될 겁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기 전에는 방역만이 유일한 방법으로 보입니다. 방역의 핵심은 전파 경로를 아는 겁니다. 지금도 뉴스에는 이동 금지라는 자막이 뜹니다. 바이러스가 어떤 길을 따라 이동하는 거죠. 이 말이 지구 위에 그어진 도로로 바이러스가 다닌다는 의미처럼 들리고 멧돼지가 매개체로 보이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결국 사람의 이동이 원인입니다.


이 바이러스의 경로에 대해 역추적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떻게 아프리카에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마치 몇 년 사이에 번진 것 같지만 시간은 무척 오래 걸렸죠.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수백 년 걸려 우리에게 온 겁니다. 그런데 균이 지나온 길은 인간의 폭력적이고 탐욕적인 자본주의 역사의 그것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종교전쟁이 시작된 15세기 유럽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정치와 시장의 판이 요동쳤습니다. 16세기부터 대서양 연안 국가들로 무게중심이 바뀌고 그 국가들은 부를 위해 아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로 확장해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총과 칼이 들려 있었고, 부의 이동을 위해 쇠로 만든 철도가 깔리고 뱃길이 연결됐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근대의 자본주의 체제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정복자의 폭력적 수탈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온 길이 이 경로와 유사합니다. 그렇다면 그 균이 애초부터 아프리카에 있었을까요.


돼지의 가축화는 기원전 6000년 중국과 서아시아에서 시작됐습니다. 15세기 명나라는 대선단을 꾸려 원정을 떠났고 30년에 걸쳐 아시아 남쪽 해안을 따라 아라비아를 거쳐 아프리카까지 갔습니다. 이 경로는 7만년 전 마지막 빙하기를 겪은 인류가 에티오피아에서 생존해 수만 년 동안 전 세계로 이주한 경로의 반대 방향이기도 합니다. 원정대에는 돼지가 포함됐고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남쪽에 새로운 동물이 등장하게 됐죠. 그리고 16세기 유럽 열강의 식민지 개척이 돼지를 아프리카에 전하며 종이 섞였습니다. 19세기 말 케냐에서 질병으로 소들이 죽자 영국은 자국의 돼지를 아프리카에 공급해 대규모 돼지 사육을 했고 이때 ASFV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후 풍토병이 된 ASFV는 거꾸로 유럽을 공격했습니다. ASFV는 저온에도 강해 숙주인 돼지가 죽은 후에도 생존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가공식품에서도 수개월 이상 감염력이 유지되죠.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들어간 바이러스의 매개체는 살아 있는 돼지가 아니라 항공기 기내식에 들어간 가공식품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방역 시스템마저 허술했죠.


이후 ASFV는 숙주인 멧돼지를 통해 전파됐습니다. 동유럽의 숲에는 멧돼지가 많아 서쪽으로 향한 육로를 통제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유럽에 가까운 중국 서쪽에서 ASFV가 발생했고 몽골부터 동남아시아와 북한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겁니다.


긴 경로는 7만년 전 인류가 걸은 길이었고, 16세기에 제국주의 열강이 총을 들고 쇠로 길을 내며 걸어온 길입니다. 인류가 걸어온 길을 균이 그대로 다닌 것인데, 이것이 우연일까요.


얼마 전 뉴스를 보니 베트남에서 살처분된 돼지를 강에 쓰레기처럼 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닐 겁니다. 처리에 비용이 들기 때문이죠. 결국 모든 원인이 자본으로 수렴됩니다.


지금 우리의 이성과 합리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욕망이고, 수단은 자본입니다. 인류에게 강력한 힘이 된 총과 쇠는 결국 자본이라는 무기로 변했죠.

당국은 지난 9일 강원과 인접한 경기 연천군 신서면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확진돼 강원 북부 지역에 대한 방역을 강화했다.  [사진= 연합뉴스 제공]

당국은 지난 9일 강원과 인접한 경기 연천군 신서면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확진돼 강원 북부 지역에 대한 방역을 강화했다. [사진= 연합뉴스 제공]


돌이켜보면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맥은 승자독식인 것 같습니다. 강자만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거죠. 진화라는 측면에서도 찰스 다윈이 언급한 자연선택 방식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습니다. 자연에서는 다수의 공존이 더 일반적이기 때문이죠.


지난한 진화 과정에서 생물의 다양성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승자독식이었다면 지구에는 소수의 강자만 남을 겁니다. 지금의 강자는 바로 인류일 터인데, 이게 오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화의 역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달의 뒷면처럼 보지 못하는 경쟁의 이면에는 협력과 공존의 비밀이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지구에 있는 8억마리의 돼지와 공존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좁은 공간에 갇혀 공장에서 찍어내듯 생산되고 사육되며 지구 위의 한 종인 생명체의 영양 공급을 위해 식탁에 오르는 운명이 됐습니다. 결핍의 시대에서 지금은 과잉의 시대가 됐고 그들의 희생은 고마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본 논리인 수요와 공급의 대상일 뿐입니다.


자연에서는 서로 만나기 어려운 생명체들을 한 공간에 두거나 인간 활동 영역에 깊게 들여와 유전체가 변하고 바이러스가 편승하면서 그 활동 영역이 뒤섞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은 줄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이 만든 거대한 시나리오의 한 부분일지도 모르기에 우리는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물론 지금은 낭만적인 반성문을 쓸 시간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급한 불을 꺼야 합니다. 그런데 불이 꺼지면 축하의 의미로 삼겹살을 구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위기 또한 잊을 것이고 생명의 소중함도 잊겠죠.


오늘도 자유로를 달리며 뉴스를 듣습니다. 파주시의 모든 돼지가 살처분된다는 소식입니다. 그들은 자유로운 삶을 누릴 권리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자유조차 없나 봅니다. '자유'라는 언어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인류의 오만을 떠올려봅니다.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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