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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오렌지나무 밑의 탐욕

최종수정 2018.12.05 17:07 기사입력 2018.12.0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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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

이미혜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에게 바쳐진 신전이라 할 수 있다. 1층에 있는 두 개의 커다란 타원형 전시실은 모네의 '수련'으로 벽 전체가 뒤덮여있다. 각각 다른 시각과 날씨를 배경으로 한 여덟 점의 '수련'은 보는 이를 빛과 물과 색채의 향연에 빠져들게 한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원래 튈르리 궁에 딸린 온실이었다. 궁전에 온실을 만드는 풍습은 17세기부터 유행했다. 궁전 정원사들은 오렌지나무 같은 귀한 식물들을 겨울 동안 온실에 보호했고 거기서 오렌지 정원을 뜻하는 이름이 유래했다. 유럽 다른 나라들도 프랑스를 모방해 궁전에 온실을 설치하고 오랑주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1870년까지는 나폴레옹 3세가 튈르리 궁에 살았기 때문에 오랑주리는 제 구실을 했다. 보불전쟁에 패하자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튈르리 궁은 뒤이어 일어난 파리 코뮌의 난리 통에 파괴되었다. 오랑주리만 덩그러니 남겨졌다가 1920년대에 '수련'을 전시할 공간으로 선택되면서 훗날 세계적인 미술관이 될 발걸음을 내딛었다.

오랑주리의 지하 2층에는 인상주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파리파'로 불리는 20세기 초 화가들의 작품은 이 미술관의 자랑이다. 모딜리아니, 드랭, 세관원 루소, 위트리요의 알짜 작품들과 다른 데서는 만나기 힘든 수틴의 작품 스물두 점을 소장하고 있다. 눈의 호사를 즐기며 작품을 훑어가다 한 남자의 초상화 앞에 발이 멈춘다. 모딜리아니의 특징이 살아있는 각진 얼굴, 어린애 같이 작은 입, 하지만 단호한 눈길을 한 젊은 신사. 20세기 초 파리 미술계를 주름잡던 미술상이자 오랑주리 지하 2층 컬렉션의 주인이었던 폴 기욤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야심만만했던 그는 열일곱 살 때 운을 시험하기 위해 파리로 올라갔다. 그림을 배우고 싶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법률 공부 하는 학생이라고 거짓말을 해 창고의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고무를 취급하는 창고였다. 어느 날 기욤은 수하물 속에 우연히 끼어든 가봉의 토속 가면을 발견했다. 그것은 일종의 계시와도 같았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박물관을 드나들며 안목을 키웠고 아프리카 민예품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새롭고 강력한 소재를 찾던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은 아프리카 미술에서 영감을 발견했다. 수집가들도 아프리카 미술에 눈을 돌렸다. 사업이 잘 되었지만 기욤은 작은 성공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 장사로 쌓은 인맥을 이용해 본격적인 미술품 거래로 발을 뻗었다. 그는 큰 재목이 될 만한 화가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었다. 무명에 가까운 피카소, 마티스, 드랭을 사들였으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모딜리아니, 위트리요도 사들였다. 이십 대 중반에 기욤은 성공한 미술상이 되었다. 돈을 벌자 예술후원자 행세를 하며 예술잡지를 발행해 필명으로 미술비평을 끄적거렸다. 꿈꾸었던 미술가는 되지 못했지만 미술가를 지배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폴 기욤, 노보 필로타', 1915년
(105 x 75 cm, 오랑주리 미술관, 프랑스 파리)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폴 기욤, 노보 필로타', 1915년 (105 x 75 cm, 오랑주리 미술관, 프랑스 파리)

모딜리아니는 1914년 기욤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 몽마르트르에 화실을 마련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초상화 넉 점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그 중 하나이다. 기욤은 모던한 신사로 그려져 있다. 짙은 색 양복과 모자, 적갈색 배경이 얼굴과 흰 셔츠를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담배를 쥔 왼손은 스케치 수준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얼굴은 각진 선으로 추상화되어 있지만 콧수염, 눈썹에 개성이 드러나 있다. 관객을 향한 시선에는 자신감이 넘친다.
화면 네 귀퉁이에는 글씨가 들어 있다. 왼쪽 위에 폴 기욤, 아래에는 '노보 필로타'(새로운 조종사), 오른쪽 위에는 '스텔라 마리스'(북극성)이란 단어와 함께 별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모딜리아니의 서명이 있다. 기욤이 북극성에 의지해 현대미술의 방향을 인도하는 조타수라는 의미이다. 스물세 살 젊은이에게 바치는 찬사로는 지나친 감이 있다. 그래서 이를 빈정대는 의미로 해석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아무튼 이 젊은 미술상이 아방가르드 미술과 맺고 있는 관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스물아홉 살이 되자 기욤은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내로 고른 줄리엣 라카즈는 아름다웠지만 천박한 여자였다. 라카즈는 부자와 결혼하자 구질구질했던 처녀 시절 흔적을 싹 지우고 이름도 도메니카로 바꿨다. 아내가 고객들을 잘 주물렀으므로 기욤은 만족했다. 기욤의 운은 1930년까지였다. 가파르게 정상에 올랐던 만큼 내리막길도 가팔랐다. 대공황이 일어났는데 런던과 뉴욕으로 사업을 확장한 것이 패착이었다. 부부 사이도 안 좋았다. 부부는 각자 애인을 두고 겉돌았다. 기욤은 살이 찌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1934년 마흔두 살로 생을 마쳤다. 일부 사람들이 아내가 왜 남편을 빨리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을까 숙덕거렸으나 잊혀졌다. 기욤의 컬렉션은 도메니카의 소유가 되었다.

도메니카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부터 만나오던 장 발테르와 1941년 재혼했다. 발테르의 아내가 이혼을 거부했으므로 그녀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발테르는 그저 그런 건축가였는데 1925년 동부 모로코의 납 광산 채굴권을 사들여 돈방석에 앉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납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것이다.

전후의 파리에서 도메니카는 알아주는 사교계의 귀부인이었다. 호화로운 저택에서 사치스럽게 살면서 전남편의 컬렉션을 일부 팔기도 하고, 추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좋아졌다고 보긴 어렵다. 그녀는 아방가르드 작품을 팔고 그 대신 인상주의를 사들였다. 예전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애인도 만들었다. 발테르는 아내를 두고 도메니카와 사귄 것을 제외하면 점잖은 사람이었으나 이번 애인 모리스 라쿠르는 극우파 의사로 이기적인 냉혈한이었다. 도메니카는 병을 핑계로 그를 집에 불러들이고 심지어 남편과 셋이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발테르는 라쿠르를 싫어했지만 아내가 성질부리는 게 귀찮고 자신도 심장병이 있던 터라 하자는 대로 했다. 1957년에도 셋이서 여행을 하던 도중 발테르는 자동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며칠 뒤 도메니카는 남편이 작성했다는 유서를 들고 나타났다. 이 유서는 수상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발테르와 전부인 사이의 자식들이 상속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있었다. 발테르의 급작스런 죽음도 개운치 않았다. 도메니카는 조사를 받았으나 사회유력인사인 지인들과 변호사들의 도움으로 무사했다.

앙드레 드랭, '큰 모자를 쓴 폴 기욤 부인의 초상', 1928~1929년
(92 x 73 cm, 오랑주리 미술관, 프랑스 파리)

앙드레 드랭, '큰 모자를 쓴 폴 기욤 부인의 초상', 1928~1929년 (92 x 73 cm, 오랑주리 미술관, 프랑스 파리)

두 해 뒤인 1959년 도메니카는 살인교사혐의로 고발을 당해 프랑스 전역을 들끓게 했다. 고발한 사람은 의붓아들 장 피에르였다. 기욤이 물려줄 자식도 없는데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하겠다고 하자 도메니카는 아이를 입양했다. 기욤이 예상 밖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장 피에르는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되었다. 도메니카는 각종 치사한 방법으로 아이를 들볶고 괴롭혔다. 아들은 겨우겨우 자라서 성인이 되었고 집이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살아갔다. 도메니카는 아들이 기욤의 유산에서 제 몫을 주장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장 피에르가 너무나 싫었던 도메니카는 이 청년을 없애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라쿠르가 대신 나서서 한 건달을 물색해 살인을 청부했다. 건달은 장 피에르를 납치했으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죽이지는 않았고 역으로 도메니카와 라쿠르를 협박하고 사방 들쑤시며 다녔다. 풀려난 장 피에르는 이 사건을 경찰에 고발했다. 도메니카의 변호인은 장 피에르가 꾸며낸 일이라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건에 연루된 라쿠르, 도메니카의 남동생 장 라카즈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도메니카는 아무 일 없었다. 이즈음 그녀는 자신의 컬렉션 전부를 정부에 기부하겠다는 증서를 작성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도메니카는 친자식이 없었으므로 컬렉션은 어차피 국가에 기증하게 되었을 것이다.

도메니카는 그 후에도 반성하지 않고 힘 닿는 대로 장 피에르를 해코지했다. 그러면서 관절염 통증 완화를 위해 복용한 약물에 중독되어 죽어갔다. 1977년 도메니카가 사망하자 컬렉션은 그녀의 저택에서 오랑주리로 옮겨졌다. 장 피에르는 1979년 약간의 유산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고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오랑주리는 늘어난 소장품을 전시할 공간이 없었으므로 개조 작업을 벌였다. 1984년 지하 2층 전시실이 모습을 드러냈고 발테르-기욤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도메니카가 갖고 있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미술관은 예술을 애호했던 귀부인으로 도메니카를 소개하고 있다. 달리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이미혜 예술사 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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