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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포럼] 우리가 모르고 사는 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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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body has the right to be different."


버클리에 도착한 첫날, 대학 주변을 산책하다가 인적 끊어진 버스정류장에서 이 문구를 보았다. 문구 아래 그림이 있는데, 한 마리의 물고기에 다양한 색깔을 입혀 한 생명의 다채로움을 일깨운다.

하물며 하나의 인간, 한 마을, 한 공동체, 한 사회, 한 나라, 이 세계에는 얼마나 많은 다름이 있을 것인가.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존재할 권리가 있는데 이걸 자주 잊어버리고 똑같아지자고 강요한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존재할 권리가 있다.


봄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한산한 대학 캠퍼스에서 한 무리의 어린 학생들을 만났다. 얼짱 각도로 셀카를 찍는 아이들. 뜻밖에 익숙한 한국말이 들린다. "하버드 대학 셔츠를 입고 버클리 대학에서 사진을 찍는다. 우하하!"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그 어린 꿈들이 잘 무르익기를 기도했는데, 그처럼 단체로 견학 온 아이들을 거의 매일 만났다. 우리나라의 유난한 교육열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 관계자 말에 따르면 버클리 대학만 해도 중국ㆍ독일 다음으로 한국 유학생이 많다고 한다.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로서의 명문대학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고 배우는지 고민해야 할 책무 또한 새롭다.

학교 주변에는 제 목소리를 내고 사는 권리를 실천하는 포스터들이 눈에 많이 띈다. 환경 문제의 중차대함을 알리는 문구, 인종과 성에 따른 차별과 증오, 혐오에 대해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집 창가에 심심치 않게 붙어 있다. 학교 사무실 창밖에 '저항하라(Resist)'는 문구가 걸려 있다. 캠퍼스 가로등에 평범한 학교 배너를 달지 않고 '버클리 구성원 5명 중 3명이 젠더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낸다'는 배너를 걸어놓았다. 배너를 마주하는 당신은 그 5명 중 3명인지 2명인지 잠시라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민 공동체가 주관한 문화 행사에 초대돼 가보니, 한국ㆍ중국ㆍ필리핀ㆍ러시아 등 민족별 이민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동체를 이루지 못할 정도로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품을 것인가, 나아가 정책적 대안이 있는지, 날카롭고 뼈아픈 문제 제기가 잇따른다. 올바른 가치에 대해 질문하고 자기가 믿는 바에 따라 행동하고 의견을 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되고 공유되는 문화다. 공교롭게 나를 초대한 교수님을 처음 만난 장소도 학교 안에 있는 '자유언론운동카페(Free Speech Movement Cafe)'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힘든 싸움을 통해 얻어지는지, 그 카페를 들르는 사람들은 매일 새길 것이다.


이름이, 말이, 언어가, 존재를 아울러 한 사회를 규정한다. 당연하지만 잘 모르고 사는 권리들에 대해 '이것이 그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개인들의 눈물겨운 희생이 뒤따랐다. 겸양의 미덕이 유난한 우리 사회에서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목소리 내는 개인을 별나다고 손가락질하는 문화가 여전하다.


하지만 지금도 수많은 다름을 반영한 가치를 만들고 지키기 위한 지난한 싸움이 열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 모든 움직임이 다 의미 있다. 그 모든 싸움을 기리는 작업도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마틴 루서 킹 거리를 걸으며 서울에도 김구 거리, 유관순 거리가 생겨나길 바라본다. 어느 곳에서나 진보와 후퇴를 반복하는 역사이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내는 용기와 의지가 모여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 나가리라 기대해본다.


정은귀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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