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가는 또 어떤가. 봇물을 이룬 '법정 드라마'에선 권력의 횡포와 대중의 분노가 넘쳐난다. 부패한 권력과의 투쟁은 마치 뉴스를 접하는 듯 피로감을 안긴다. 방송계 관계자는 "진부한 선악 대결과 이분법적 프레임은 '촛불'과 '태극기'로 나뉜 탄핵 정국과 엇비슷하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마침표를 찍기보다는 행을 바꿔 새롭게 글을 써 나가는 행위와 다름 없었다. 쾌활한 명랑소설이 될지, 음울한 비극이 될지는 국민들의 손끝에 달렸다. 이 권한대행이 사흘 뒤 치른 퇴임식에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토로한 이유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도리를 일깨웠지만 선고가 남긴 생채기는 아직 씻기지 않고 있다. 탄핵에 불복한 '아스팔트 보수(태극기 집회 참가자)'는 거리에 쏟아졌고, 탄핵 이후 닥칠지 모를 경제ㆍ안보 위기를 우려하며 한숨짓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반면 광장에선 샴페인이 터졌다. 외신들은 탄핵 심판날 밤, 거리 곳곳에서 벌어진 '치맥 파티'를 대서특필했다.
프랑스대혁명도 마찬가지다. 18세기 말 파리광장은 혁명재판소의 루이 16세 처형 소식에 환호성이 울렸다. 하지만 권력 투쟁이 본격화한 뒤 광장의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은 시민은 4만명이 넘었다.
다행스러운 일도 있다. 우리가 위정자를 단죄하는 데 있어 '법치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발발한 '재스민 혁명'은 단박에 아프리카와 아랍권의 정세를 바꾸어 놓았다. 민중봉기가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으나 힘의 공백을 초래하며 내전이란 끝없는 혼란을 초래했다. 이미 '4ㆍ19혁명' 등 질곡의 세월을 거쳐 민주주의를 체득한 우리는 이들과 달랐다.
아쉬운 점도 있다. 민주주의는 나와 다른 생각을 서로 인정하되 법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탄핵에 찬성한다면, 불복할 자유도 있다. 16세기 영국의 '사상 검열법'을 적용하는 게 아니라면, 또 박 전 대통령의 추종자들이 법질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관용하는 것 또한 민주주의다. 마찬가지로 법치에 근거해 우리는 '자연인' 박근혜를 법정에 세울 권리도 갖고 있다. 진정 우려되는 건 치열한 다툼 속에서 논리가 실종됐다는 사실이다.
오상도 정치부 차장 sd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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