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이 속담은, 아무리 좋은 벼슬이라도 본인이 원치 않으면 마다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수많은 벼슬 중에 왜 '평양감사'가 이 속담의 주인공이 됐을까.
평양감사는 조선시대 평안도 전체를 관할하던 고위직 관료였다. 전라도의 '전라감사', 경상도의 '경상감사'처럼 각 도를 다스리는 감사직은 여럿 있었고, 더 높은 직위로는 '영의정', '좌의정', 심지어 '임금'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평양감사가 속담 속 주인공이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신간 '우리말에 깃든 조선 벼슬'은 우리가 무심코 쓰는 속담과 관용어 속 '벼슬'의 뿌리를 추적한다. 책에 따르면 평양은 17세기부터 빠르게 성장한 도시였다. 교통의 중심지로서, 수도 한성과 국경 도시 의주를 잇는 주요 간선도로가 지나갔고, 청나라와 일본을 잇는 해상 무역의 거점 역할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잉류 조치'였다. 평양감사는 청나라 사신을 접대해야 했는데, 그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이유로 조정에 세금을 상납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재정을 운용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평양감사는 상권과 세금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쥔 자리였다.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속담에까지 등장했을까.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팩트 체크'에 있다. 저자는 익숙한 속담이나 표현들이 실제 역사와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꼼꼼히 따져본다. 예를 들어 '고약하다'라는 표현의 어원으로 세종대왕과 자주 의견 충돌을 빚었다는 '고약해'라는 벼슬아치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저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그런 인물이 실제로 있었고, 그렇게 큰 영향력을 가졌을까.
결론은 고약해와 고약하다는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세종대왕을 이상적인 리더로 기억하려는 현대의 시선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라는 분석이다. 백성을 아끼고 비판을 수용하는 지도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책 곳곳에서는 '기록의 힘'이 빛난다. 저자는 명확한 사료가 없는 어원은 과감히 의심하고, 조선왕조실록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철저히 검증한다. 우리가 자주 쓰는 사자성어 '함흥차사'의 경우에도, 실제로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들러 간 사신들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를 태종실록을 통해 확인한다. 실록에는 사신이 누구였는지, 어디서 죽었는지, 어떤 경위였는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쓰는 수많은 말의 어원은 여전히 '설''로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왕의 눈치를 보면서도 객관적 기록을 남긴 조선 시대 사람들의 태도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우리말의 뿌리를 찾는 여정은 언제나 흥미롭다. 이번엔 벼슬 관련 속담과 관용어를 통해 옛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결국 오래전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고민하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갔다는 사실이 새삼 반갑게 다가온다.
우리말에 깃든 조선 벼슬 / 이지훈 / 푸른역사 / 1만3000원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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