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오버 더 모빌리티](19)
기아, 피터 슈라이어 영입 비하인드
슈라이어 영입 계기 '디자인 경영' 강화
브랜드 전략·대외 평판·일하는 방식 변화
K시리즈 성공에 내부 구성원 자신감
세계 디자인상 휩쓴 기아, 디자인 명가 탄생
2006년 독일 아우토반을 달리던 피터 슈라이어는 낯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본인을 기아의 대표이사라고 소개한 남성은 '기아에서 일할 디자인 총괄을 찾고 있다며 한번 만나볼 생각이 있는지'를 물어왔다. 한국인다운 매우 조심스러운 접근이었다. 그가 기아에 대해 아는 사실은 한국 자동차 브랜드라는 것과 전 직장동료가 1년 전 이직한 회사라는 정도였다. 이 전화를 시작으로 기아와 20여년 가까이 인연을 맺게 된 슈라이어는 통화가 끝난 순간 이미 자신이 대형 프로젝트의 초입에 서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활시위를 당겨 과녁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활처럼, 그는 인생 후반부의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같은 해 서울. 정의선 당시 기아 사장(현 현대차그룹 회장)은 하루가 멀다하고 유럽 지사에 연락을 넣었다. 그가 대표이사에 오른 이후 주도하는 첫 대형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서다. '디자인 기아' 그가 주도한 새로운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정 사장은 전 세계인의 머릿속에 기아라는 브랜드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각인하기를 원했다. 독일·일본·미국 브랜드가 수십 년간 쌓아온 엔진 기술력을 후발 주자인 한국 브랜드가 하루아침에 따라잡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신 창의적인 영역에서 겨루는 디자인 분야에선 우리도 한번 승부를 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은 단기간에 브랜드 혁신을 시도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과도 같았다. 한국 디자이너들을 이끌어 줄 거물급 디자이너의 영입이 절실했다.
기아 실무진은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회장의 후계자인 정 사장이 직접 주도하는 사안이기에 수소문은 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성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다고 이류 인사를 영입하기엔 프로젝트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는 지적을 들을 게 뻔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기아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했다. 글로벌 C 레벨 인사들은 아무리 거액의 연봉을 준다 해도 기아에 올 생각은 안 했다. 이곳에서의 경력이 본인의 커리어에 전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해 5월 정 사장은 피터 슈라이어를 한국으로 초청했다. 슈라이어는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아우디 TT, 폭스바겐 뉴비틀, 골프 등 글로벌 메가 히트 모델의 디자인을 총괄했다. 기아는 슈라이어에게 당시 대표이사보다 더 많은 100만유로의 연봉과 함께 디자인 총괄 부사장직을 제안했다. 정 사장은 보수 그 이상의 비전을 보여주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남양연구소에서 한국 디자이너들의 열정을 보여주며 앞으로 함께 그려갈 미래를 이야기했고, 첫 만남에 슈라이어 가족을 사저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슈라이어가 가족적인 유대감, 끈끈한 인간애 등을 중시한다는 점을 포착하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훗날 슈라이어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기아는 모든 것을 그려낼 수 있는 하얀 도화지 같은 브랜드였다"며 "정의선 회장을 만난 첫 순간부터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강한 끌림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슈라이어의 영입은 기아에 크게 3가지 변화를 불러왔다. ▲브랜드 전략이 디자인 중심으로 변화했으며 ▲기아에서의 슈라이어의 성공은 우수한 글로벌 C 레벨 임원 영입의 물꼬를 텄고 ▲회사 전반에 수평·창의적으로 일하는 방식이 확산하기 시작했다.
기아의 변곡점, 디자인
슈라이어의 합류 이후 기아의 디자인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기아 디자인의 변신은 단순히 제품을 업그레이드한 차원이 아니었다. '외관이 예뻐졌다'는 의미를 넘어 디자인이 브랜드의 정체성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디자인을 통해 소비자에게 일관된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하는지를 보여준 대표 사례로 기록된다.
과거 기아는 기능 중심의 무난한 디자인의 차가 대부분이었다. 동글동글하고 깔끔한 느낌은 줬지만 어딘지 모르게 개성이 부족했고 평범한 인상이었다. 전 라인업의 디자인에 일관성이 없었고, 자동차 디자인의 정수인 비율의 미학을 찾기도 어려웠다.
2000년대 초반 출시된 기아의 대표모델 디자인을 살펴보자. 우선 1997년 출시된 기아 세피아2의 디자인은 1세대의 각진 모델에 비해 유선형을 강조했다. 전면과 측면, 후면부 모두 곡선을 강조한 디자인을 채택하면서 이전보다 트렌디해졌다는 평가는 받았지만 오히려 일본차와 비슷해졌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기아 세피아의 후속 차종인 스펙트라도 디자인과 기능성이 조화를 이룬다는 긍정적인 반응이었지만 역시 개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따라왔다. 인테리어도 전반적으로 저렴한 재질을 써서 가성비차 이미지가 강했다. 결국 기아 디자인에 대한 총평은 '일본 브랜드를 모방했으나 개성이 부족하고 디테일에서 부족하다'는 내용이 주된 평가를 이뤘다.
슈라이어는 기아 디자인에 개성을 부여하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목표는 차량의 외관만 보고도 한눈에 기아차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동차의 얼굴에 해당하는 전면부에 '타이거 노즈(tiger nose)' 그릴을 적용했다. 넓은 그릴의 중앙이 위아래로 오목하게 파인 이 디자인은 기아의 시그니처가 됐다. 타이거 노즈 디자인의 핵심 개념은 2007년 기아가 공개한 '키(Kee) 콘셉트카'에 처음 적용됐으며, 준대형 세단 K7을 시작으로 중형 세단 K5는 물론,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쏘울, 경차 모닝까지 전 라인업에 걸쳐 적용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디자인의 덕을 크게 본 모델은 중형세단 K5다. 2010년 이전 국내 중형 세단 시장은 현대차의 YF 쏘나타와 르노삼성의 SM5가 양분하고 있었다. YF 쏘나타가 이전 세대인 NF에 비해 급격한 디자인 변화를 시도하면서 일부 반감을 느끼는 소비자도 있었다. 반대로 또 다른 경쟁 모델인 SM5는 신형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의 변화가 거의 없어 고루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이 중간 지점을 찾아줄 모델을 기아는 만들어냈다. K5는 젊고 스타일리시한 30·40 중산층 소비자를 겨냥한 디자인 세단을 콘셉트로 탄생했다. 옆에서 보면 지붕(루프)에서 차량 뒤쪽으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쿠페형 루프라인을 채택해 날렵한 실루엣을 강조했다. 보닛은 길게, 트렁크는 짧은 비율로 만들어 역동적인 느낌을 주도록 했다. 차체 옆면을 타고 흐르는 크롬 장식이 앞유리 창문 기둥(A필러)에서 뒤쪽 창문까지 이어지도록 하면서 차를 실제보다 날씬하고 길어 보이게 했다.
30·40 소비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K5는 본격 판매가 시작된 2010년 6월에만 1만673대 팔리며 경쟁 모델인 YF쏘나타(9957대)와 SM5(7315대)를 제쳤다. 물론 K5의 신차효과는 두세 달간 지속되고 연간으로는 쏘나타가 앞선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업계에선 '국민차' 쏘나타의 아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한 순간이었다. 기아 내부적으로는 1998년 현대차그룹에 합병된 이후 은연중에 깔려 있던 패배감을 걷어내고 구성원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일깨워 준 계기이기도 했다.
세계 디자인상 휩쓴 기아, 디자인 명가(名家) 탄생
슈라이어는 2021년 현대차그룹 디자인경영담당 사장에서 물러난 이후 현재는 고문 활동까지 마쳤다. 그가 남긴 디자인 기아의 유산은 루크 동커볼케 현대차그룹 최고크리에이티브책임자(CCO)와 카림 하비브 기아 글로벌디자인담당 부사장 등 후배 디자이너들이 이어가고 있다. 기아는 디자인 철학인 '오퍼짓 유나이티드(Opposites United ·상반된 개념의 창의적 융합)'를 기반으로 감성적이고 개성 강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자동차 디자인은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호불호가 크게 나뉘는 분야다. 절대적인 평가 기준은 없지만 공통적으로 '좋은 자동차 디자인'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요소는 있다. 우선 자동차 디자인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기능적인 완결성을 갖춰야 한다. 공기역학적 요소나 시야 확보, 운전자 조작의 직관성 등이 기능적 디자인에 해당한다. 두 번째로는 비례와 균형으로 아름다운 실루엣을 만들어내야 한다. 슈라이어의 우상이자 현대차 포니를 디자인한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자동차 디자인의 핵심은 비율에 있다"며 "개성을 주고 싶다고 해서 못생긴 차를 만들어선 안 된다"며 균형의 미를 강조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자동차 디자인을 통해 브랜드 일관성과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심미적인 아름다움과 창의성은 가장 기본적인 요소에 포함된다.
기아는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하는 브랜드로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기아는 세계 3대 디자인상 중 하나인 독일 '레드닷어워드(Red Dot Award)'에서 네 번이나 최우수상(Best Of the Best)을 수상하는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2018년 스팅어를 시작으로 2022년 EV6, 2024년 EV9, 2025년 EV3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는 대부분의 글로벌 완성차 브랜드는 물론 현대차도 세우지 못한 기록이다. 스팅어가 처음으로 디자인상을 받았을 때 자동차 전문 매체 카스쿱스(carscoops)는 "스팅어의 이번 수상은 기아에게 특별한 업적을 남겼다"며 "페라리·맥라렌 등 슈퍼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델을 선보이며, 도로 위 최고의 디자인을 선보이는 브랜드가 됐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오늘날 '디자인 기아'는 새로운 도전 과제에 직면해 있다. 소비자의 선호도, 심미적인 아름다움, 기능적인 실용성을 모두 충족하는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물론, 친환경성까지 고려한 디자인을 완성하는 일이다. 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는 차량의 생산-사용-폐기 등 전 과정의 탄소배출을 줄이는 방향으로 환경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환경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배출가스 저감은 물론, 인테리어 등 소재의 친환경성까지 구매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가 됐다. 이를 위해 기아는 차량 인테리어에 천연가죽 사용을 점차 줄이는 대신 옥수수, 유칼립투스 등 바이오 소재가 첨가된 가죽이나 재활용 페트병을 활용한 패브릭 등 다양한 친환경 소재를 적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버섯에서 추출한 균사체를 기반으로 친환경 가죽을 개발해 신차에 적용하는 프로젝트도 구상하고 있다.
우수연 기자 yesim@asiae.co.kr
꼭 봐야할 주요뉴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