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처의 이면, 공항 전쟁의 민낯
경호 충돌·홈마 무질서 속수무책
방관과 혼선…제도는 어디에 있나
바야흐로 'K컬처' 전성시대다. K팝과 K드라마, K무비가 세계 팬덤을 구축하며 한국은 문화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화려한 성공의 이면에는 예외 없이 반복되는 혼란이 있다. 바로 공항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스타들의 출국 전쟁이다.
팬, 사진기자, 홈마(홈페이지 마스터), 일반 승객이 한데 뒤엉키며 어느새 출국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자동문이 깨지고, 팬이 넘어지고, 경호원과 홈마가 충돌하는 일이 되풀이된다. 벌떼처럼 몰려드는 인파 사이로 스타는 숨 가쁘게 뛰고, 경호원과 매니저는 고성을 지르며 길을 튼다. 공항 측은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반복되는 출국 사고, 구조적 문제로 확산
지난 몇 년간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에서는 연예인 출국 과정에서 반복적인 사고가 발생해왔다. 2017년엔 워너원 매니저가 팬을 밀치며 유아 동반 승객까지 접촉했고, 2018년엔 NCT 127의 경호원이 기자를 폭행해 소속사가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2022년에는 엔하이픈의 경호원이 팬을 거칠게 밀치는 영상이 공개돼 논란이 재점화됐고, 2023년엔 NCT DREAM 팬이 경호원에게 밀려 늑골 골절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졌다.
배우 변우석의 경호원이 인천공항에서 일반 승객들에게 플래시를 비추고 탑승권을 검사하는 등 과잉 경호를 펼쳐 논란이 일었고, 인천공항공사는 해당 사설 경호업체를 고소했다. 지난달에는 NCT WISH의 멤버 시온의 출국 현장에서 경호원이 일반 승객에게 반말과 고압적인 태도로 통제하자 이에 분노한 승객이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영상이 확산했다. 같은 날, 신인 걸그룹 하츠투하츠의 김포공항 출국 현장에 팬들과 취재진이 몰리면서 일반 승객의 통행이 방해됐고, 이에 한 중년 남성이 고성을 지르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장면이 포착돼 논란이 됐다.
반복되는 출국길 사고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구조적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공항은 본래 출입국을 위한 공공 인프라지만, 어느새 스타의 출국 일정이 '하루 한 번 열리는 쇼케이스' 현장이 돼버렸다.
스타 출국 영상과 사진은 뉴스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하며 공항 출국길 자체가 브랜딩의 일부가 됐다. 연예기획사나 광고주는 공항에서 찍히는 사진을 무시할 수 없다. 일부 패션 협찬은 공항 사진을 전제로 수천만 원의 광고 가치를 지닌다. 공항에서 찍힌 스타의 한 컷이 브랜드의 가치 상승을 이끈다.
이러한 '출국길 마케팅'은 팬덤 열기와 맞물려 점차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다. 문제는 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팬으로 위장한 '팔이피플', 이른바 홈마들은 고가 장비까지 동원해 찍은 이미지를 되팔거나 굿즈로 만들어 수익을 올린다. 일부는 같은 항공편을 예약한 뒤 탑승구까지 따라가 사진을 찍고 환불한다. 스타들의 항공편 정보는 온라인상에서 유료로 거래되기도 한다. 한 대형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홈마는 해외 SNS 플랫폼 계정으로 활동하며 ID를 바꿔 처벌을 피해 가는 경우가 많아 사실상 단속이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법적 책임을 묻기란 쉽지 않다. 연예기획사는 팬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법적 대응에 소극적이고, 공항공사 역시 일반 승객에 대해 직접 제지할 권한은 없다. 과잉 경호로 팬이 다쳐도, 홈마가 기자와 충돌해도, CCTV 확인 후 마무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계가 모호한 상황에서 공항 측, 연예기획사, 팬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는 일반 출국객에게 돌아간다.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통행이 막혀 수속이 지연되고, 압사 등 안전사고로 이어질 뻔한 장면이 반복된다.
이 혼란 속에서 누군가는 이익을 얻는다. 스타는 노출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소속사는 콘텐츠를 확보하며, 홈마는 사진을 팔고 굿즈를 만든다. 공항은 명확한 규제도 책임 주체도 없이 반복되는 사태를 지켜볼 뿐, 구조적 한계 속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마케팅이 만든 아수라장, 해법은
이학재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은 지난해 배우 변우석의 과잉 경호 논란 이후 열린 국회 청문회에서 "사전에 충분히 예견하지 못했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이후 공항공사는 그해 9월부터 '유명인 입출국 세부 대응 매뉴얼'을 도입했고, 10월에는 '연예인 전용 출입문' 운영을 검토했지만, 특혜 논란에 시행 하루 전 철회했다.
현재 공항이 시행 중인 대응책에는 ▲인원 밀집도에 따른 대응 강화 ▲사설 경호 통제 및 위법 시 고발 조치 ▲연예기획사 대상 협조 요청 공문 발송 등이 있다. 하지만 논란은 여전하고, 해결은 요원하다. 문화체육관광부, 국토교통부, 경찰 등 유관기관 간 조율체계도 부재한 상황에서 문제 해결의 주체조차 모호하다.
일본의 경우 연예인의 항공편 정보를 비공개하고, 공항 내 팬 커뮤니케이션 창구를 운영해 질서를 유도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LAX)은 연예인 출입구를 별도로 운영하고, 사설 경호에 대한 규제를 병행한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각 기관의 '책임 떠넘기기' 속에 혼란만 반복되고 있다.
일부 팬클럽은 공항에서 자율적으로 질서를 유도하는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비플래시·비접촉·비추돌'을 원칙으로 이동선을 확보하고, 자원봉사자를 동원해 팬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현장의 규모와 속도를 따라가기엔 한계가 뚜렷했다. 지속 가능한 대안이 아닌 데다, 자율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현장의 공감대다.
문화는 산업이 됐고, 스타의 출국은 이제 사적인 이동이 아니다. 수백만 명의 팬이 지켜보는 콘텐츠 생산의 순간이자, 공공 인프라가 소모되는 일상이다. 이제 질문은 명확하다. 문화의 확장과 공공 안전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나. 정책은 어디까지, 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 '오늘도 사고 없이 지나가길'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이 전쟁 같은 출국길의 해법이 될 수 없다. 우려가 현실이 되기 전에, 근본적인 묘책이 필요하다.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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