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건축가 유현준 홍익대 교수
건축가 유현준은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 교수이자 ㈜유현준건축사사무소 대표로, 건축을 통해 도시와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해온 인물이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건축설계 석사, 하버드대학교에서 도시디자인 석사를 마치고 미국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 그는 국내외를 넘나드는 실무 경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공간 인간'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어디서 살 것인가' '공간이 만든 공간' 등의 책으로 복잡한 건축 개념을 일상 언어로 풀어내며 대중과 깊이 공감해 왔다. tvN '알쓸신잡', OtvN '어쩌다 어른', SBS '집사부일체' 등 다양한 방송을 통해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도시의 의미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그는 "건축은 사람을 위한 틀"이라는 신념 아래 공간이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어떻게 규정하고 확장하는지를 끊임없이 탐구한다.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에 있는 유현준건축사사무소에서 그와 만났다. 기술과 예술, 인간과 도시가 교차하는 이 시대에, 유현준은 여전히 묻는다. "우리는 어떤 공간에 살며, 그 공간은 우리를 어떻게 바꾸는가."
-건축이라는 길을 선택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사실 전 뭐 하나에 몰입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외우는 거 싫어했고,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것도 잘 못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고시 공부는 질색이었고, 수학이나 음악처럼 시간 압박이 있는 과목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나마 좋아했던 건 그림 그리는 거였어요. 그림은 내가 원할 때 시작하고 멈출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미술 쪽으로 관심이 갔고, 미술은 중고등학교 과목 중 유일하게 '자기 표현'이 가능하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그냥 미술만 하기엔 또 어딘가 부족했어요. 당시엔 아버지가 기자셨는데,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누군가 또는 어떠한 것을 비판하는 일이 많은데 그런 일의 방식을 보면서 "나는 나중에 남이 한 일에 대해 말을 하기보단 뭔가를 직접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여러 장래희망에 대한 추천들이 있었지만 지나치고 보니 남는 게 건축이더라고요. 문과도 아니고 이과도 아닌, 예체능과 공학이 교차하는 그 중간 어디쯤. 적성 검사하면 항상 50:50으로 나왔던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진짜 '세상에 남는 일'을 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제게 건축이란, 결국 '말보다 행동' '비판보다 창조'를 선택한 결과이자 세상과 나 사이를 연결해주는 가장 인간적인 도구 같아요.
-영감을 준 인물이나 롤모델이 있나요.
▲20대 땐 사실 명확한 롤모델이 없었어요. 오히려 저는 "건축의 답은 건축 밖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건축가보다도 다른 분야 사람들에게서 더 큰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저는 마이클 조던을 굉장히 존경했어요. 단순히 농구를 잘해서가 아니라, 경기 중의 긴장감이나 불안감을 어떻게 자기 방식대로 극복하는지를 보면서 "아 저건 진짜 삶의 태도구나"라고 느꼈거든요. 또 현대 물리학자들, 특히 새로운 개념을 증명해내는 사람들에게도 감탄했어요. 뭔가를 말로만이 아니라 수학적으로, 실험적으로 보여준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이가 들수록은 건축가들에게도 점점 감동을 받게 됐어요. 30대 땐 루이스 칸이, 50대가 되니까 르 코르뷔지에가 더 와닿더라고요. 젊을 땐 감성적인 언어가 좋았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구조와 질서, 시대를 꿰뚫는 힘 같은 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도 딱 한 명의 롤모델을 꼽기는 어렵지만, 시기마다 제가 감응했던 '사고방식'들이 저를 만든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어떤 사람처럼 되고 싶다'보다는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따라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공간'과 '건축'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이 있을까요.
▲제 건축 철학은 정말 간단한 두 문장으로 정리돼요. "공간은 정보다", 그리고 "건축은 관계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건축을 기능적으로만 보지만 저는 늘 그 이상을 생각해요. 기능이야 기본이에요. 예를 들어 자는 공간, 먹는 공간은 당연히 있어야 하잖아요. 그건 말 그대로 '기계적인 조건'이고요. 하지만 그 위에 정말 중요한 건,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예요. 좋은 공간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를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만들어줘요. 그래서 공간을 설계한다는 건 단순히 벽과 지붕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정하고, 시선을 조절하고, 자연스럽게 만날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종의 관계 설계라고 봐요.
이걸 제대로 이해하려면 공간의 기원을 한번 떠올려볼 필요가 있어요. 저는 인간의 공간 개념은 '모닥불'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하거든요. 따뜻한 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둥글게 둘러앉으면서, 자연스럽게 거리와 방향이 정해지고, 그 안에서 안과 밖이 생기고, 밝음과 어둠의 경계가 생겨요. 그게 공간인간의 시작이에요. 이런 공간 감각은 동물들에게는 없어요. 인간만이 '불 앞의 거리감'을 감각하고, 관계를 조율하면서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죠. 저는 거기서부터 건축이 시작됐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 단계는 '동굴 벽화'예요. 인간이 자기 생각을 남기고 공유하려는 첫 번째 시도가 벽에 그림을 그리는 거였죠. 말보다 훨씬 본능적이고 강력한 커뮤니케이션이었어요. 그런 상징을 공간에 남기면서 우리는 공동체, 문화, 종교 같은 집단 감각을 만들어갔고, 건축은 그 모든 것을 담는 '기억의 틀'이 되었어요. 그래서 건축은 곧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시각화하고, 조직화하고, 전달해온 가장 오래된 정보 기술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병원의 대기실, 학교의 복도, 아파트의 베란다처럼 작은 공간들이 사실은 다 '어떻게 사람을 움직이게 할 것인가'를 계산한 결과물이거든요.
또 하나 중요한 게 '동선'이에요. 공간 안에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누구와 마주칠지, 어디에서 멈추고 시선이 머무를지를 설계하는 게 건축이에요. 좁은 복도를 지나면 대화가 줄어들고, 시야가 트인 공간에서는 마음도 열리거든요. 그래서 저는 건축을 '무형의 질서를 설계하는 일'이라고도 말해요. 물리적인 구조물로 사람을 가두는 게 아니라 그 구조물 사이의 흐름과 리듬을 설계해서, 오히려 사람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 거죠. 저는 건축은 단순히 집을 짓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삶의 습관을 디자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떻게 걷고, 어디에 앉고, 누구와 얼마나 머물게 될지를 결국 공간이 결정하거든요. 결국 건축은 눈에 보이는 구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와 행동을 설계하는 예술이자 기술이에요.
-인공지능(AI) 시대가 본격화된 변화 속에서 건축가는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요.
▲AI가 정말 빠른 속도로 건축 설계 안으로 들어오고 있어요. 예전에는 건축가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1차 아이디어 생성이나 직관적인 형태 제안 같은 부분도 이제는 AI가 훨씬 빠르게 수백, 수천 개를 제안하죠. 그럼 건축가는 이제 뭐하냐고요? 그 수많은 제안들 중에서 뭘 선택하고 왜 선택했는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사실 건축 설계라는 게 도면을 그리고 공간을 만드는 게 전부가 아니거든요.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건 커뮤니케이션이에요. 건축주는 왜 이 공간이 필요한지, 어떤 기능을 원하는지 설명하고, 때로는 행정기관, 시공사, 구조기술자, 전기설비팀까지 수많은 이해관계자들과 끊임없이 의견을 조율하고, 조정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전체 설계의 80% 이상을 차지해요. 그러니까 오히려 AI가 형태를 만들어주는 시대가 되면 될수록, 인간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건 '이 공간이 왜 이래야만 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사고력과 통찰력, 그리고 관계를 조율하는 능력이 될 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게 인간 건축가의 역할이 더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명확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존재라는 본질은 AI가 대체할 수 없거든요.
-실제 작업에서 AI와의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요.
▲저는 AI랑 꽤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어요. MIT에서 공부할 때, 당시 건축과 안에 '셰이프 그래머'라는 개념이 있었는데 이게 뭐냐면, 건축가가 어떤 생각의 문법을 통해 설계를 발전시킨다는 개념이에요. 예를 들어 어떤 건축가가 주택을 설계할 때 남쪽에 현관을 두고 방을 배치했는데 어느 날 생각이 바뀌어서 서쪽으로 현관을 옮기면 그 이후의 설계는 당연히 달라지겠죠. 그런데 AI가 이 건축가의 과거 설계 과정을 학습해서 "당신이라면 이럴 경우 이렇게 바꿨을 거야"고 다음 평면을 예측해서 제시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 깜짝 놀랐죠. 이미 건축가의 '생각하는 방식'조차 학습될 수 있구나, 이건 단순한 도면 생성이 아니라 건축가의 사고 구조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요즘 AI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을 보면, 다들 픽셀 기반이에요. 하지만 건축은 선으로 구성된 추상적인 사고의 결과물이거든요. 선 하나의 굵기, 밀도, 간격, 이런 것들이 다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AI가 도면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추상화된 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걸 이해하게 되는 순간, 건축가와 AI는 진짜로 '협업'을 하게 되는 거죠. 저는 AI가 건축가의 도구를 넘어서 '파트너'가 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고 생각해요. 그 시점이 오면, 건축가의 역할도 다시 새롭게 정의돼야 할 거예요.
-앞으로 휴머노이드나 비인간 존재들이 인간의 일상 공간에 함께 머물게 된다면, 건축은 어떤 식으로 달라지게 될까요.
▲당연히 달라질 거예요. 저는 AI가 처음 등장했을 땐 아직 '가상 공간'에만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어요. 인간은 물리적인 공간에 살고, AI는 디지털 공간에 존재했죠. 그런데 이제는 휴머노이드라는 형태를 통해 AI가 아날로그 공간, 즉 우리가 사는 현실로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두 다리로 걷고,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기계가 인간 공간을 공유하는 시대가 왔다는 거예요.
그럼 이제부터는 집 안 구조를 설계할 때 사람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로봇도 고려해야 하죠. 예를 들어 문 너비, 천장 높이, 가구 배치까지도 사람이 편한 것뿐만 아니라 로봇이 쉽게 작동할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단순히 기능적인 차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로봇과 함께 사는 공간은 인간에게 완전히 새로운 심리적 환경이 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저는 앞으로 건축은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방식을 새롭게 디자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간은 단순히 벽과 바닥이 아니라 관계의 무대거든요. 이제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 사람과 기계 간의 관계까지 공간이 품어야 해요. 이건 건축가에게 굉장히 흥미롭고도 도전적인 과제예요.
-예산이나 규제 등 현실적 제약이 전혀 없다면, 교수님께서 꼭 한번 설계해보고 싶은 공간이 있나요.
▲저는 도시 전체를 설계해보고 싶어요. 그냥 멋진 박물관 하나, 멋진 주택 하나가 아니라요. 스마트시티 같은 걸 정말 제대로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요즘 시대의 문제들은 건물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사람들의 이동 패턴이 복잡해지고, 기후 문제, 에너지 문제, 갈등과 밀집도까지 전부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하나의 빌딩을 설계한다고 해결될 수 없어요. 그렇다 보니 도시라는 시스템 자체를 통째로 새롭게 설계할 필요가 있는 거죠. 예를 들어 에너지 동선,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흐름, 물과 공기의 순환, 정보가 전달되는 방식, 이런 것들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면서 공간을 짜야 해요.
만약 정말 아무런 제약 없이, 예산이 무한하고, 규제도 없고, 정치적 이해관계도 없다면 저는 물리 법칙만 지키는 조건 안에서 가장 에너지 효율적이고, 가장 인간다운 도시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하지만 사실 그런 도시를 만드는 게 단순히 기술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결국 중요한 건 그 도시 안에서 사람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느냐,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느냐거든요. 그래서 건축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공간이 삶을 바꾸고, 관계를 정리하며, 결국 사회를 설계하는 틀'이기 때문이에요.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결국 '사람을 위한 구조'를 누가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의 싸움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 이 시대에 건축을 공부하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꼭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요즘 친구들 보면, 이거 해서 미래에 뭐가 될 수 있을지, 직업이 있을지부터 걱정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건축은 그냥 건축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에요. 진짜 중요한 건 그 과정을 통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정리하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배운다는 거예요. 건축학과를 다니다 보면 철학, 공학, 예술, 사회학, 심리학까지 다 건드리게 돼요. 공부 양도 많고, 과제도 많고, 밤도 많이 새죠. 근데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힘은 꽤 오래 가요. 그리고 그건 꼭 설계도를 그리지 않더라도, 어떤 분야를 가든 그 사람만의 방식으로 발현돼요. 건축과 나왔다고 다 건축가 되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정말 다양한 길로 가요. 시공, 마케팅, 전략기획, 심지어 방송이나 콘텐츠 제작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요. 똑같이 로마에 여행을 가도, 건축을 배운 사람은 그 도시에 숨겨진 시간의 결을 읽게 돼요. 그게 바로 건축이 주는 가장 멋진 선물 중 하나예요. 직업이 뭐든,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공간을 읽고 구조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삶을 훨씬 더 풍부하게 해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다시 20살로 돌아간다면 똑같이 건축을 선택할 거예요. 아마 많은 건축가들이 저랑 똑같이 대답하지 않을까 싶어요.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김혜연 안무가(여니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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