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책 기조다. 그는 우방과 적을 가리지 않고 아메리카 퍼스트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움직이고 있다. 취임 직후 파리기후협약,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탈퇴한 데 이어 캐나다와 멕시코에는 25% 관세를 부과하려다 한 달 유예했다. 미국과 패권 다툼을 벌이는 중국에 10% 추가 관세를 때린 건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북미 경제 공동체, 특히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캐나다에까지 관세폭탄을 예고한 건 큰 충격을 안겼다.
이는 전임자인 조 바이든 전 대통령과는 확연히 달라진 기조다. 바이든은 중국, 러시아, 북한 등 권위주의 체제 국가에 날을 세우며 자유, 인권,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과 연대해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트럼프에겐 우방도, 적도 없다. 미국의 이익만 있다. 한미 관계 또한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에 따라 '리셋' 될 수 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정부가 발빠르게 움직여야 하지만 계엄·탄핵 사태로 권한대행의 권한대행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사실상 '아노미' 상태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기대하긴 어려운 실정이다.
일본은 달랐다. 트럼프는 지난 7일 백악관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미·일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이시바는 트럼프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이어 취임 후 두 번째로 만난 해외 정상이다. 미국 현지 언론은 이시바가 이른바 '아첨의 예술'을 펼치며 트럼프를 추켜세웠다는 관전평을 내놨다. 이시바는 트럼프에게 "신이 당신을 구했다", "TV에선 무섭고 강한 성격으로 보였지만 만나보니 진지하고 파워풀했다" 등 칭찬을 쏟아냈다. 무역·안보 재무제표를 중시하는 트럼프 앞에서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확대, 국방비 증액, 대미 투자 1조달러로 확대 등 선물 보따리도 한가득 풀었다.
일본이 트럼프발(發) 관세폭탄 등을 최종적으로 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이번 정상회담은 일단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시바는 최선을 다해 트럼프를 칭찬하고 아첨을 통해 웃음을 유발했다. 긴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관세 관련 질문을 철저히 차단했다"고 전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로우키 모드의 리더가 미국 대통령과 따뜻한 개인적 관계를 시작했다"며 "이시바는 첫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와 협력하는 방법을 보여줬다"고 썼다. 이시바가 사전에 고개를 숙이는 방식으로 트럼프 리스크를 차단했다는 평가다.
일본 정상이 발 빠르게 트럼프 리스크 예방에 나서는 동안 한국의 대미 외교 공백은 지속되고 있다. 그 사이 우리 기업들의 불확실성 역시 점점 커지는 상황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대가로 정부 보조금을 약속받았지만 지급되지 않거나 대폭 감액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대차·기아, LG전자 등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멕시코에 생산기지를 건설한 우리 기업들은 관세 리스크에 직면했다. 대미 무역수지 흑자도 한국 기업을 상대로 한 트럼프의 관세 부메랑으로 날아 올 공산이 크다. 지난해 미국의 대(對)한국 무역적자는 660억달러로, 한국은 미국의 무역적자가 가장 큰 국가 9위에 올랐다. 이 같은 대미 무역흑자 달성 이면엔 우리 기업이 미국 현지 투자를 늘리며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에 적극 대응한 것도 복합적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트럼프가 이 같은 사정을 봐줄 리 없다.
정부는 미국산 에너지 수입을 늘리고 조선업 협력·방위비 분담금 확대 방안 등을 아우르는 패키지 딜 제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탄핵 정국과 조기 대선 가능성으로 관료들의 적극적인 대응엔 한계가 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처했던 윤석열 대통령은 현재 직무정지 상태다. 톱다운 방식의 협상과 개인적 친분을 중시하는 트럼프를 상대할 정상이 우리에겐 없다. 트럼프 시대 개막 직전 대통령이 스스로 제 발을 묶어버린 한국과 '아첨의 예술'이란 평가까지 들어가며 총리가 발빠르게 움직인 일본. 우리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일본의 대미 정상 외교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속은 까맣게 타고 있다.
뉴욕(미국)=권해영 특파원 roguehy@asiae.co.kr
꼭 봐야할 주요뉴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