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미국 '본테라 오가닉 에스테이트(Bonterra Organic Estate)'
1987년 설립…미국 유기농 와인의 효시
유기농 포도로 순수한 맛 표현 집중
"우리의 새 이름은 이 시대의 위대한 신호입니다."
본테라 와이너리의 전 최고경영자(CEO) 지안카를로 비안체티(Giancarlo Bianchetti)는 와이너리의 이름을 '본테라 오가닉 에스테이트(Bonterra Organic Estate)'로 바꾸며 자신들의 사명 변경이 와인업계 전체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자부했다.
대부분의 유기농 와인 생산자는 스스로 친환경 생산 관행을 통해 과거보다 건강하고 더 좋은 품질의 포도를 재배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와인 라벨 등을 통해 자신들의 와인이 유기농 제품이라는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리는 데는 소홀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본테라가 와이너리 이름에 유기농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명시함으로써 본인들의 지향과 방식을 분명히 공표하는 것은 물론 자신들과 같은 와인 생산 관행이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조류가 되길 바랬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본테라 오가닉 에스테이트는 바니 펫처(Barney Fetzer)라는 인물에게 정신적 뿌리를 두고 있다. 1920년 미국 네브래스카주(州)에서 태어난 펫처는 1950년대 캘리포니아주로 터전을 옮긴다. 이주 초기에는 목재업에 종사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항상 포도와 와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멘도시노 카운티(Mendocino County)의 레드우드 밸리(Redwood Valley) 지역에 부지를 매입하고 포도나무를 심으면서 와인업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펫처는 지역을 대표하는 생산자로 성장하게 된다.
본테라는 바니 펫처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세대에서 시작됐다. 펫처는 생전에 지속가능한 유기농 방식으로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의 가족들은 이러한 펫처의 철학을 고이 담은 유기농 와인 생산하기로 뜻을 모았고, 그렇게 1987년 본테라가 설립되게 된다. 본테라(Bonterra)라는 이름은 프랑스어로 '좋은'을 의미하는 '본(bon)'과 라틴어로 땅을 뜻하는 '테라(terra)'가 더해진 합성어로 '좋은 땅'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와이너리가 처음부터 무엇을 지향했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다.
유기농 포도, 땅이 보여주는 순수성의 극치
자연과의 조화를 기반으로 한 와인 생산을 기치로 내 건 만큼 유기농 농업은 본테라 에스테이트의 핵심 요소다.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본테라는 농사는 땅과 쌍방향의 관계를 통해 이뤄지는 작업이라는 신념으로 유기농 농법을 이어오고 있다. 사실 본테라가 유기농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이유는 단순하다. 유기농 포도가 품종과 땅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맛을 표현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포도밭에서는 화학 비료나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천연 퇴비와 흔히 '커버 크롭(Cover Crop)'이라고 부르는 피복작물을 활용해 땅의 비옥함을 유지하고 생태계를 보전한다. 본테라는 매년 봄 포도밭 사이에 콩과식물과 양배추과식물, 허브 등 피복작물을 심어 생물다양성을 증진한다. 강화된 생물다양성은 곤충을 비롯한 유익한 생물들에게 서식지를 제공해 포도밭 주변의 생태적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준다.
커버 크롭을 비롯해 생물다양성을 위한 다양한 식재 활동은 동시에 토양의 비옥도를 끌어올리고, 표토 침식을 예방하며, 잡초의 성장까지 자연스럽게 억제할 수 있다. 합성 투입물이 필요 없는 살아있는 토양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또한 수확 후에는 포도 껍질과 씨앗 등 와인 생산과정에서 남은 찌꺼기를 퇴비로 만들어 포도밭에 다시 투입하고, 이를 통해 지력 개선하고 영양소의 순환을 완성한다.
겨울에는 지역 양치기들과 협력해 포도밭에 양 떼를 데려와 방목하는데, 양들이 잡초를 뜯어 먹으면서 토양의 걸기와 활력이 부여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밖에 경운을 하지 않는 방식을 채택해 표토의 안정성을 높이는 동시에 온실가스의 배출량을 줄이고, 물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태양열 에너지를 도입하는 등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유기농은 미국에서 가장 엄격하게 규제되는 식품 라벨이다. 유기농 식품 인증을 받기 위해선 비료와 살충제, 제초제의 사용이 금지되는 것은 물론 토양과 물, 동물 및 노동자 복지, 안전한 제품 취급 등도 기준 이상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현재 본테라는 '비콥(B-Corp, Benefit Corporation)'을 비롯해 엄격한 기준으로 유명한 미국 농무부 산하 유기농 인증기관 'CCOF(California Certified Organic Farmers)'의 인증을 획득했고, '재생 유기농 연대(Regenerative Organic Alliance, ROA)'의 '재생 유기농 인증(Regenerative Organic Certification, ROC)'을 받은 가장 큰 와이너리이기도 하다.
멘도시노, 美 유기농 와인의 발상지
본테라 에스테이트의 포도밭이 자리 잡은 멘도시노 카운티는 캘리포니아주 와인 생산지 가운데는 최북단에 위치한 지역이다. 멘도시노라는 이름은 16세기 스페인 항해사들이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이자 부왕령이었던 '누에바 에스파냐(Virreinato de Nueva Espana)'의 안토니오 데 멘도사(Antonio De Mendoza) 총독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멘도시노에는 1850년대 골드러시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탐험가와 농부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처음 소규모 와이너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이어진 금주법이 끝날 무렵 이 지역 와이너리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고, 포도밭 자리에는 배 과수원이나 견과류 나무들만 남아있었다.
멘도시노가 와인 산지의 모습을 되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를 주도한 것이 바로 바니 펫처다. 펫처가 '펫처 빈야드(Fetzer Vinyards)'를 설립하고 나서야 멘도시노는 비로소 와인 산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펫처를 중심으로 멘도시노의 포도밭 대부분은 일찍부터 유기농법으로 재배됐는데, 이는 캘리포니아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본테라가 자신들을 미국 제일의 유기농 와인 생산자라고 자부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현재 펫처와 본테라 에스테이트는 모두 칠레의 와인 대기업 '콘차 이 토로(Concha y Toro)'가 소유하고 있다.
멘도시노 카운티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와인 생산지인 나파(Napa)와 소노마(Sonoma) 카운티보다 북쪽에 위치한 넓고 다채로운 지역이다. 멘도시노 카운티의 와인 생산지는 크게 앤더슨 밸리(Anderson Valley AVA)와 멘도시노(Mendocino AVA) 두 개의 AVA(American Viticultural Area, 미국 포도 재배 지역)로 나뉜다. 태평양 해안에 가까운 앤더슨 밸리는 아주 서늘한 기후로 스파클링 와인뿐 아니라 리슬링(Riesling)과 게뷔르츠트라미너(Gewurztraminer) 같은 향이 풍부한 화이트 와인을 주로 생산하는 지역이다.
이에 비해 본테라 에스테이트가 있는 멘도시노 AVA는 앤더슨 밸리보다 규모가 크고 기후도 훨씬 더 따뜻하고 건조하다. 이는 900m에 이르는 해안 언덕 뒤에 있어서 태평양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인데, 이런 건조한 환경은 이 지역에서 유기농 농업이 빠르게 확산하는 배경이다. 이 지역에선 주로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진판델(Zinfandel), 시라(Syrah) 등으로 타닌이 부드러운 무거운 바디의 와인이 생산된다.
더 맥냅, 본테라 최초의 유기농 인증
본테라의 와인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제품은 '본테라 에스테이트 컬렉션 카베르네 소비뇽(Bonterra Estate Collection Cabernet Sauvignon)'을 꼽을 수 있다. 와인은 9월 말에서 10월 사이 포도를 손으로 수확해 줄기를 제거하고 압착해 원액을 추출하고,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따뜻한 발효를 거친 후 말로락틱 발효를 통해 부드러움을 더한다.
이후 프랑스 오크통에서 6개월 동안 숙성하는데 새 오크통의 비중은 40%다. 완성된 와인은 보라색 색조가 감도는 어두운 가넷색을 띤다. 검은 체리와 검은 건포도 등 다크 프루트의 향을 중심으로 가죽, 담배, 흑연 등 전반적으로 퇴폐적인 향과 뉘앙스를 보여준다는 평이다. 입 안에선 잘 익은 풍부한 질감의 타닌이 느껴지며, 5년 이상 숙성이 가능하다.
본테라는 프리미엄 제품군인 본테라 싱글 빈야드 컬렉션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대표 제품으로 꼽히는 것은 '본테라 더 맥냅 카베르네 소비뇽(Bonterra The McNab Cabernet Sauvignon)'이다. 더 맥냅은 1996년 본테라에서 처음으로 바이오다이내믹 인증을 받은 포도밭 '맥냅 랜치'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들어진다. 러시안 리버의 지류이자 철갑상어 산란지인 맥냅 크릭에서 이름을 따온 맥냅 랜치는 본테라 유기농 농업의 중심이 되는 밭으로 약 150헥타르(ha) 규모의 부지다.
2020 빈티지 기준 카베르네 소비뇽 80%에 프티 시라(Petit Syrah) 20%를 섞어 양조했다. 포도밭 블록별로 구분한 포도를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10~14일간 발효하고, 이 가운데 좋은 품질의 와인만 골라 최종 블렌딩을 진행한다. 이렇게 완성된 와인의 25%는 프랑스 새 오크통에 14개월 숙성해 마무리한다. 와인은 밝고 진한 붉은 색을 띠며 블랙커런트, 무화과, 다크 초콜릿 향이 매력적이다. 입 안에선 단단하지만 섬세한 타닌이 넉넉한 중간 입맛을 형성해 카시스, 토스트, 미묘한 미네랄리티의 풍미로 이어진다. 담배와 아니스의 향이 조화를 이루며 긴 여운을 남긴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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