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년 한국 금융과 투자업계를 지켜본 산증인
한미은행·씨티은행 등 글로벌 은행장으로 14년 근무
세계최대 사모펀드 블랙스톤 한국법인 회장으로 변신
한국 산업 구조와 금융·투자에 대한 객관적 조언
만추의 종묘 매표소 앞. 초봄의 찬 서리와 한여름의 뙤약볕을 지나 이제는 짙게 물든 단풍 사이로 한국 금융·투자 40년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하영구 블랙스톤 한국법인 회장이 걸어왔다.
새벽에 일어나 집 주변을 걸으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그는 70대에도 여전히 경쾌한 발걸음의 현역이다. '직업이 은행장', '금융계의 신사'라고 불리는 하 회장은 씨티은행, 블랙스톤 등 글로벌 금융·투자회사에서 최고경영자(CEO)로 일하며 한국의 금융·투자 산업을 그 누구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지켜봐 온 인물이다.
1981년 씨티은행 서울지점에 첫발을 디딘 이후 뱅커로 성장한 그는 2001년에는 48세의 나이로 한미은행장에 선임되며 최연소 은행장 기록을 세웠다. 2004년 한미은행이 씨티그룹에 인수된 이후에도 계속 은행장을 맡다가 2014년 퇴임하고 은행연합회장직을 맡았다. 2019년부터 SK하이닉스 사외이사로 활동하다 2022년 블랙스톤 한국법인 회장직에 올랐다.
글로벌 금융사의 시각으로 한국의 금융과 투자, 산업을 바라본 그는 어쩌면 K-밸류업과 기업집단 세대교체 등으로 성장통을 앓고 있는 우리 경제에 필요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종묘에서 시작해 서순라길, 율곡로까지 이어지는 단풍길을 걸으며 긴 이야기를 나눴다.
평소 걷기 운동을 즐기는 하 회장은 기자들보다 보폭이 넓고 걸음이 빨랐다. 60대 중반까지만 해도 스키나 스노보드를 즐겼지만, 부상의 위험으로 최근 들어서는 걷기 운동을 최고로 친다.
"저는 아침형 인간입니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아침 운동을 1시간 이상 하는데 걷기를 가장 선호합니다. 하루에 팔천보에서 만보 걷기를 목표로 합니다. 한강변이나 봉은사 주변을 주로 걷지요. 과거엔 트레킹, 골프, 스키, 스노보드 등 액티브한 스포츠를 즐겼는데 최근에는 허리 문제로 주로 걷거나 실내 자전거 위주로 바꿨습니다."
1953년생 하영구 회장은 지금까지 커리어를 유지하고 있는 비결에 대해 "철저한 자기관리와 글로벌 마인드(국제 감각)"를 꼽았다. "잘 때도 웃는 얼굴로 자려고 노력한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4년 동안 외국계 은행장을 역임하고 3년간 전국은행연합회 회장을 지내는 등 국내외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쌓아왔다. 하 회장은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활약한 리스크 극복의 숨은 공신이기도 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추진하기 위해 미국 최고위급 당국자를 움직여야 했는데 이때 하영구 당시 씨티은행장이 미국 재무장관을 맡았던 로버트 루빈 씨티그룹 고문과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을 연결하는 데 역할을 하기도 했다.
-4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한국 금융·투자산업의 발전을 지켜보셨다.
1981년에 씨티은행에 입사해서 IB 대표, 기업금융 대표, 소매금융 대표를 거쳐 2001년에 칼라일 컨소시엄의 포트폴리오 은행이었던 한미은행장으로 갔다. 만 3년 만에 한미은행을 씨티은행에 매각하고 성공적 엑시트(자금회수)를 한 후에 같은 배를 탔던 칼라일 한국 대표 김병주 회장은 MBK를 설립했고, 저는 씨티은행의 한미은행 인수 조건인 '키 맨 스테이(key man stay)' 조항으로 또다시 씨티은행으로 갔다. 저는 MBK처럼 내 돈 버는 재주는 없고 경영인의 자질만 있는 것 같다. 커리어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주로 금융 위기와 관련한 일들이다. 외환위기, 카드 사태,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다 겪었다. 해비타트와 파트너십 관계를 유지하며 매년 한여름에 구성원들과 땀 흘리며 집짓기 봉사를 하던 기억도 새록새록 하다.
-글로벌 금융사의 시각에서 한국 금융은 어떤 장단점이 있나.
한국의 금융, 특히 은행은 과거 개발 시대에 수출 산업이나 제조업을 지원하는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도 금융산업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높은 잣대와 기대감이 있다. 사회에 기여하고 산업 발전에 도움을 주며 금융 소비자를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사들이 이런 기대를 소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한편으로는 금융을 바라보는 눈높이의 조정이 좀 필요하다. 금융지주사들은 금융의 맏형으로 맞바람을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발전하고 있고 국가적으로 기여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최근 금융 분야에서 새로운 경쟁력으로 주목하게 되는 곳도 있다. 미래에셋그룹, 메리츠금융그룹, 카카오뱅크다. 미래에셋은 글로벌화에 성공했다. 특히 자산운용 면에서 괄목할 만하다. 그리고 메리츠는 금융도 일반 산업처럼 보상제도를 통해 좋은 인재를 수혈하고, 주주 친화적인 회사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카카오는 아시다시피 금융산업의 디지털화에 선발대 역할을 했다.
-최근 K-디스카운트를 밸류업 하기 위한 정부와 기업들의 노력이 이뤄지고 있는데 어떤 부분을 좀 더 강화하면 좋을까.
밸류업은 시의적절했다. 올바른 국가적 과제이고 처방도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모든 숙제를 한 번에 다 할 수는 없다. 점진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보완해 나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경우도 10년 이상 시간을 투자해서 요즘 많은 성과를 내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상장사 스스로가 주식시장에 상장한 목적이 무엇인지 한 번쯤 되돌아보는 것이다.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이 채 안 되는 경우 이를 극복할 의지와 실천이 필요하다. 기업 스스로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배당 확대 등 주주 친화적인 방안들을 제시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업의 가치를 저평가받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하면 결국 주주들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런 면에서 밸류업 시행 이후 가장 괄목할 만한 주가 상승을 보인 은행 중심의 금융지주사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한국 재벌기업들은 대부분 3·4세 경영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이런 승계 과정에서 각종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한국의 산업은 상당 기간 이런 재벌 기업집단이 이끌어갈 텐데 이 과도기적 성장통, 부작용을 최소화할 방법이 있을까.
Pain(고통)이 있지만, 기회의 순간이기도 하다. 창업주가 아니라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긍정적으로 바뀌는 부분도 많다. 신수종의 산업에 진출하거나 비핵심 부문을 스핀오프(Spin-off·분사)하고 핵심 리더십팀에 대한 변화도 이뤄지고 있다. 글로벌 진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재벌만이 아니라 중소·중견기업도 비슷하다.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가치 창출을 위해서 블랙스톤과 파트너십을 모색하는 기업도 있다. 비핵심 기업의 스핀오프를 위해 노크하는 경우도 늘었다. 일본도 이런 과정을 겪고 있으며 지배구조의 선진화와 함께 최근 획기적인 변화가 진행 중이다. 이런 과정에서 블랙스톤은 소니(Sony) 그룹의 소니 페이먼트 서비스를 인수했다.
-최근 MBK가 영풍과 함께 고려아연 경영권을 인수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간 대형 사모펀드들이 보였던 기업친화적인 모습이 아닌 행동주의적 면모를 보여 산업계와 자본시장뿐 아니라 정계까지 들썩였다. 어떻게 보셨는지 평가가 궁금하다.
큰 파장과 파급이 있는 사안이다. 직접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이해 관계자는 물론이고 많은 기업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안이다. 다만 블랙스톤의 경우에는 파트너십 문화(partnership culture)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비즈니스를 같이 만들어 가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사모펀드(PEF)들이 최근 리테일 분야까지 진출하면서 좀 더 개인 금융소비자들과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정말 프라이빗하게 운영되던 PEF들이 대중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이유와 앞으로의 모습이 궁금하다.
사모펀드 등 대체상품에 대한 투자 기회의 democratization(민주화)이 글로벌 추세다. 주요 글로벌 PEF의 펀딩 중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15~20%인데 앞으로 30%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기관투자자의 경우 글로벌하게 보면 대체투자 비중을 30~33%로 리밸런싱 중이다. 개인의 경우는 더 빠른 속도로 리밸런싱이 진행 중이지만 아직도 개인들의 대체투자는 1~2%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블랙스톤의 경우 13년 전에 PWS(private wealth solution) 제공을 시작으로 이 분야에서 빠르게 움직여 현재 개인투자자로부터 2조5000억달러(약 3500조원), 전체 운용자산 중 약 25%를 투자받았다. 개인은 과거 채권과 주식을 6대 4로 배분해서 투자하는 경향에서 이를 다양화해 PE 상품투자까지 투자 영역을 점차 확대하는 추세다. 아시아에서 홍콩·싱가포르가 앞서가고 최근에는 일본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일본의 경우 정부가 밸류업 프로그램과 함께 적극적 규제 완화를 통해 개인의 자산증가에 도움을 주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이다.
-SK하이닉스 사외이사로도 활동하고 계신다. 하이닉스에 수년간 계시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보셨나
많이 배웠다. 특히 AI 시대로의 대전환 초기에 AI를 구동하는 핵심 메모리칩인 HBM을 생산하는 반도체 회사의 이사회에 있는 것은 행운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메모리칩 분야인 D램과 낸드에서는 절대 강자다. 계속 유지 발전시켜야 하고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과거 일본이 그랬듯이 우리도 소재·부품·장비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 게 중요하다. 중국의 도전이 만만치 않다.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CXMT 등은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미국·일본·대만·중국 등 우리의 경쟁국들은 반도체를 안보 차원의 산업으로 접근해서 국가 전체의 지원, 보조금, 세제 혜택, 전력과 용수 등 인프라, 인력 양성 등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우리도 기술기업들이 보유한 도전과 혁신의 DNA를 잘 뒷받침 해줘야 한다. 앞으로 전 세계 유수 기업들과 파트너십도 강화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비한 플랜을 치밀하게 잘 짜야 한다는 것이다. 밸류업 인덱스에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포함돼 있는데 이에 화답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제조사의 숙제인 재투자에 드는 자금부담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자금 부담이 너무 크다. 투자를 위한 자기자본 소요를 줄이는 방안을 찾아 주주환원을 할 수 있는 여력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한국의 산업 그리고 금융에 추가적인 성장 잠재력이 있을까. 한국 시장의 남은 매력은 무엇일까
혁신적인 경제, 수출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은 여전하다. 주목받는 K컬처와 재능있는 인재 풀을 갖추고 있다. 한국은 여전히 매력적인 투자의 대상이다. 블랙스톤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김포의 물류센터와 강남 오피스 빌딩에 투자했다. 여행과 레저산업, AI 관련 인프라 예를 들면 데이터센터나 에너지 전환 인프라에 관심이 있다. 기업 인수의 경우에는 실버(생명공학) 관련 기업, 소프트웨어 기술 기업, 라이프스타일 관련 기업, 기계류 기업 등을 눈여겨보고 있다.
-한국의 금융과 투자산업을 지켜보신 업계 원로로서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후배들을 위한 조언 부탁드린다
한국 금융·투자업계는 글로벌 진출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자산운용업의 미래가 매우 매력적이다. 자산운용업의 아시아 금융허브에 대한 꿈을 한국 금융·투자업계가 실현하면 좋겠다. 한국이나 일본이 홍콩과 싱가포르 다음으로 아시아 금융허브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필요한 부분을 갖추면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의 금융·투자 산업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 현재의 가계 자산 중에서 70% 이상을 차지하는 부동산의 비중을 점진적으로 낮춰야 한다.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며 자산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교육과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밸류업 프로그램도 그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또 금융사들은 소비자들에게 글로벌 경쟁력이 있고 안정성과 수익률이 충분히 입증된 투자상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영구 회장은△1953년 전남 광양 출생 △경기고 졸업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미국 노스웨스턴대 대학원 경영학석사 △1981년 씨티은행 서울지점 △1987년 씨티은행 자금 담당 총괄이사 △1997년 씨티은행 아시아·라틴아메리카지역본부 임원 △1998년 씨티은행 한국소비자금융그룹 대표 △2001년 한미은행장 △2004년 한국씨티은행장(5연임) △2014년 은행연합회장 △2019년 SK하이닉스 사외이사 △2022년 블랙스톤 한국법인 회장
대담=이선애 증권자본시장부 부장
정리=박소연 증권자본시장부 차장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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