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 "'워라밸 중시' 젊은 의사 중심으로 변화"
美 의사 2명 중 1명 "번아웃 경험"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느끼는 번아웃에 시달리는 의사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미국에서도 쏟아지고 있다. 환자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삶을 희생한다는 기존 의료계 인식이 일과 생활의 균형, 이른바 워라밸의 중요성이 커진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달라지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미국의학협회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해 지난해 번아웃을 경험했다고 답한 의사의 비율이 48.2%였다고 보도했다. 번아웃 경험 의사 비율은 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이던 2021년 62.8%로 최고를 기록, 이후 50% 이상을 유지하다가 지난해 비교적 완화됐다.
응답률 하락에도 여전히 의사 2명 중 1명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WSJ는 20여명의 미국 의사를 인터뷰한 결과 워라밸을 원하는 젊은 의사들 중심으로 의료계의 일 중독 문화가 시정돼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의사의 주당 평균 근무 시간은 59시간, 평균 연봉은 35만달러(약 4억8000만원)로 집계된다. 의사는 연봉 수준이 높지만 정신적·신체적으로 큰 압박을 받는 직업이라고 WSJ는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외과 전문의로 30년간 일해온 63세 남성 의사인 제퍼슨 본 박사는 젊은 세대의 의사 윤리가 점차 달라지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근무 중인 주피터 메디컬 센터 응급실에서 한 달에 5~7일 야근을 선다며 또래 외과의 몇몇이 근무를 설 동안 젊은 동료들은 당직에서 제외된다고 했다. 그는 "우리 같이 '늙은 사람들(old guys)'은 응급실 연락을 받고, 30대는 매일 밤 퇴근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 내 의료 레지던트와 인턴십 프로그램을 평가, 인증하는 비영리 민간 위원회인 대학원 의학 교육 인증 위원회(ACGME)는 현재 레지던트의 주당 근무 시간을 최대 80시간, 교대근무는 최대 24시간으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 내 젊은 의사들은 개업보다는 대형 병원에 소속되는 걸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5세 미만 의사 중 개업한 경우는 32%로 2012년(44%)보다 줄었고, 45~55세 개업의 비중(51%)보다 낮다. 개업하면 근무 자율권이 크지만 비용 부담 등을 모두 혼자 짊어져야 한다. 이를 두고 한 의사는 "대형 병원에 소속돼 있는 의사들은 사업 비용을 내지 않는 대신 장시간 근무와 서류 작업을 감내하기로 한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실제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암을 연구하며 번아웃을 겪는 의사의 코치로 일하고 있는 매리 렁 박사(47)는 "많은 의사가 스스로 기계가 된 것처럼 느낀다"며 낮에는 환자를 치료하느라 밤 중에 서류작업에 시달리곤 한다고 전했다. 플로리다주 네이플스의 마취과 의사인 크리스토퍼 워싱크 박사(58)도 최근 젊은 의사들이 근무 일수를 줄이는 상황을 자주 목격했다며 자신은 근무하는 24년간 병가를 신청한 적 없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미국에서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40세 여성 의사인 카라 그레이스 레벤탈 박사는 2021년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임신 중 딸을 잃을 위기에 놓였다. 당시 상사가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는 등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병가를 쓸 수 없다고 하면서 임신 중 초음파 검사도 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초음파 검사가 예약돼 있던 어느 날 검사를 건너뛸 뻔했는데, 그날 겨우 검사를 받았고 응급 제왕절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고 전했다.
이 일을 겪은 뒤 레벤탈 박사는 존스홉킨스 병원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별다른 설명 없이 병가를 쓸 수 있도록 정책 변화를 끌어냈다. 병원은 병가 등으로 생기는 의료 공백에 대기 의사 수를 두 배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레벤탈 박사는 "다른 사람을 진료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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