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시니어트렌드③
지난 20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은 해외 기관과 협력해 '고령화와 연금 관련 시민 인식에 대한 10개국 비교'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한국을 비롯해 영국·덴마크·이탈리아·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독일·폴란드·미국에서 각 1500~2000명의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정년 연장, 고령화, 연금, 청년 일자리 등에 대한 인식 설문조사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나라별 차이가 있었는데, 유럽 국가들은 대개 정년 연장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년 연장’에 동의가 41%로 해외 주요국 평균의 3배에 달했다. 또한, 응답자의 44.8%는 조기 퇴직 의향이 없다고 했다. 조사 대상 10개국 평균인 25%보다 약 20%포인트 더 높았다. 보사연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급속한 고령화로 인한 경제적 우려와 부담을 보여 주는데, 정년 연장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가장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례적인 고령화 속도로 인한 불안감이 엿보였다.
유럽은 일찍이 고령화 사회를 맞닥뜨려 국가별로 노인 고용과 정년 연장이 뜨거운 쟁점이었다. 노령층의 복지 수준이 매우 높은 터라, 고령화로 인해 연금 제도가 근간부터 흔들리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청년들은 기술직을 기피하는 등 현장 숙련 노동자부터 정년 연장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레 등장했다. EU 회원국의 절반 이상이 62세가 정년이며 이는 단계별로 연장된 결과다. 정부도 변화해 왔지만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에서는 기업들이 시니어 고용을 꾸준히 늘려왔다. 현장에서는 점차 70세가 넘어서도 일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독일 첨단산업은 숙련 노동자의 역할이 중요해서 기업은 어떻게든 이들이 현장에서 더 일할 수 있도록 신체적 노쇠를 극복하게 해주는 공장 내 설비, 기계와 공간을 도입하고 있을 정도다. 이탈리아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만 연금수령은 60대에 가능하다.
주요 유럽 국가의 연금 액수를 살펴보면, 영국 국가 연금은 2021년 기준 주당 최대 179.60파운드(32만원, 월 140만원 전후)이고 개인연금을 추가로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평균 연금액은 2021년 1400유로(208만원), 독일은 1300유로(193만원), 이탈리아는 1200유로(178만원)다. 강력한 복지국가로 알려진 스웨덴은 1만7000크로나(223만원)다. 인구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퇴직 연령을 늘리는 정책과 유연한 퇴직 제도, 특정 직업군에 따라 다른 정년 연령을 설정하는 등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지난 9월 21일에 ACAP(Active Aging Consortium Asia Pacific)란 단체가 주관한 ‘Reversing Depopulation(인구 감소의 역설)’이란 온라인 회의가 있었다. 일본과 한국 사례가 주요 내용이었지만, 유럽 참가자들이 많아서 이민자 정책,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출산율 회복, 세대 간 활력 사례들도 다뤄졌다.
한편, 최근 프랑스에서는 2030년부터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데 반대하는 전국적인 파업과 시위가 있었다. 독일 역시도 66세인 정년을 5년 기간을 두고 67세로 상향하기로 했으나 연거푸 지연되고 있다. 연금 수령 시기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정부는 연금 고갈과 인력난에 대응하고 싶지만, ‘쉴 권리’를 생각했던 국민들은 반발하고 있다. 스위스는 이 문제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해오고 있다. 유럽 국가 중에서도 평균 수명이 가장 긴 편이기 때문이다. 2020년 출생아의 기대수명은 83.1세(한국 83.4세)다. 2050년 전체 인구의 33%가 연금을 받을 것으로 추산되면서 연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2022년 9월에 남녀 은퇴 연령을 65세로 연장했다. 올해 초 이를 더 늦추려는 정년 연장안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나 74.5%가 반대해 부결됐다.
유럽에서 국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입장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장수하는 사회는 연금 이슈 외에도 ‘일’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지 따라 대응책이 달라진다. 특히 한국은 재정적 불안감이 크기 때문이라고는 해도 유럽 국가보다 더 일하겠다는 시니어 세대가 많다. 기대 수명이 세계 최고인 우리나라는 앞으로 노인 비중이 많이 늘어날 것이다. 정부 복지 정책으로만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흐름이다. 주거, 건강, 일자리 등 모든 분야에서 비즈니스 차원에서 고령 친화적으로 전환하되, 인식 차원에서도 사회적 비용을 같이 부담해야 하는 청년 세대와 어떻게 조율할지 막연한 대응이 아니라 대비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필자는 시니어 세대 스스로가 건강하고 안전한 노후를 위해 ‘평생 현역’을 준비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보람 써드에이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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