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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의 책으로 읽는 세계]과로의 망령을 벗어나 자유의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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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구먼, 좀비와 싸우다
계속 살아나는 '좀비 아이디어'
69시간 노동론도 추가할 판
김영선의 '과로사회'서도
장시간 노동 '국민병'으로 지적
혁신적 사고 시간까지 빼앗아

[장은수의 책으로 읽는 세계]과로의 망령을 벗어나 자유의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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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시체가 무덤에서 뛰쳐나와 거리를 점령하곤 한다. 좀비 떼가 썩은 얼굴로 몰려다니면서 살아 있는 인간만 보면 앞뒤 없이 달려든다. 감염시켜 좀비를 늘리기 위해서다. 좀비 사회, 즉 삶이 죽음으로 바뀌고 희망이 절망과 교환하는 세상은 재앙이고, 종말이며, 생지옥이다.

‘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에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은 명백히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게 밝혀졌는데도, 잊힐 만하면 살아나는 아이디어를 좀비 아이디어라고 말한다.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지구 온난화를 부인하는 기후 변화 부정론, 경제학적 근거가 없는데도 부유층 세금을 낮추면 경제가 성장하리라는 희망을 되풀이하는 부자 감세론 등은 그 예다. 최근엔 코로나19 부정론도 있었다. 여기에 ‘69시간 노동론’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69시간 노동론은 인공지능을 앞세운 창조경제 시대에 반시대적으로 죽도록 일할 권리를 보장한다. 주5일 근무 기준으로, 추가 근무 수당 없이 하루 13.8시간씩 일할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말이다. 수도권 평균 통근 시간이 약 1.5시간이니, 더하면 하루 15.3시간 동안 노동에 시간을 써야 한다. 실현되면, 적정 노동시간 개념조차 없던 자본주의 초기 수준에 해당한다.

정부는 몰아 일하고 몰아 쉴 자유를 이야기하나,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법정 휴가도 다 못 쓰는 사람이 수두룩한 게 현실이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만 19세 이상 직장인 중 80.6%가 법정 연차 휴가를 전부 사용하지 못했다. 다수 기업이 너무 빠듯하게 인력을 운용 중인 탓이다. 넉넉히 인력을 굴리는 회사라면, 애초에 69시간 노동까지 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1970년대 초 청계천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한 재단사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굶주림을 이기려고 하루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 작업을 합니다.” 나중에 이 노동자는 비인간적 삶을 견딜 수 없어서 자기 몸에 불을 붙여서 세상에 항의했다. 전태일이었다. 하루 16시간 노동은 그만큼 견디기 어렵다. 이런 노동이 합법이 되면, 세상은 지옥이 된다.


그보다 100년 전,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는 ‘제르미날’에서 장시간 노동에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이 목숨 걸고 투쟁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안 돼, 어떤 식으로든 끝내야 해. 법을 통해서든, 우정 어린 이해를 통해 신사적으로 이루어지든, 아니면 모든 걸 불태우며 야만스럽게 이뤄지든. 위로부터 아래까지 사회를 청소해 깨끗하고 정의롭게 사회를 재건할 대변혁 없이 이 세기가 끝날 순 없으니까.” 긴 노동은 파업과 혁명을 유발했고, 놀란 자본가들은 법정 노동시간을 도입하는 등 사회 개혁을 수용했다.

1980년대에도 여전히 장시간 노동이 유지됐다. ‘노동의 새벽’에서 박노해 시인은 비분에 차서 노래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중략)/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1989년 노태우 정권 시절, 노동자들 요구를 받아들여 우리나라 법정 노동시간이 주 44시간, 주당 최대 64시간으로 조정됐다. ‘69시간 노동’은 한국 사회 시곗바늘을 1980년대 초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시절로 되돌리는 셈이다.


주 52시간 노동체제 아래에서도 2021년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이미 1915시간이다. OECD 평균보다 연간 약 200시간 더 일한다. OECD 국가 중 우리보다 많이 일하는 나라는 멕시코,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칠레뿐이다. 상대적 저개발 지역인 중남미 대륙에 속해 있다. 인구가 빠르게 줄어드는 나라에서 청년들을 어떻게 하면 자아를 실현하고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창조 노동에 집약시키기보다 노동 집약적 중남미형 저개발 모델에 밀어 넣으려고 고심하는 셈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우선시하는 청년들 반발은 당연하다.


김영선의 ‘과로 사회’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장시간 노동에 중독돼 있다. 회사를 집처럼 여기면서 오래 일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바쁜 게 좋은 거야”란 자조 섞인 위안,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자”라는 위기의식, “늦게까지 궁둥이 붙이고 있어야 상사 눈밖에 안 나지”란 통념, “젊을 때 일 안 하면 나중엔 일할 수 없으니, 야근은 축복”이라는 왜곡된 신념이 넘친다. 매일 탈진할 만큼 일하고 죽을 만큼 지쳐 귀가하지 않으면, 일한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김영선은 장시간 노동을 ‘국민병’이라고 부른다.


벤처 기업 같은 곳에서 흔히 들려오는 ‘월화수목금금금’도 그 한 종류다. 장시간 노동이 열정의 표현이자 능력의 증명, 자긍의 원천이자 성공의 보증 수표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적은 인원으로 큰 업적을 이루려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긴 하다. 스톡옵션 등을 통해 노동을 동업으로 만드는 업무 모델이 흔히 시도되는 이유다. 성공 시 거대 보상을 함께 나누지 않는 장시간 노동은 열정 증명을 빙자한 불공정 노동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장시간 노동의 합법화는 불공정 노동이 일상화할 위험을 내포한다.


장시간 노동의 부작용은 크다. 무엇보다 몸에 병을 달고 살게 만든다. 장시간 노동은 흔히 만성 피로, 수면 장애, 식욕 부진, 소화 불량, 당뇨병, 뇌졸중, 심근 경색 등을 유발한다. 특히, 심야 야간 근무는 인간 평균 수명을 크게 단축한다. 인류는 낮에 일하고 밤에 자도록 진화했다. 이를 오래 거스르면 몸에 심각한 이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장시간 노동은 삶 전체를 파괴한다. 스스로 돌보면서 자신을 살피는 시간, 연인과 같이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시간, 친구나 가족과 함께해 우애를 나누는 시간, 육아에 참여하고 아이와 행복을 누리는 시간, 지역에 관심을 품고 공동체를 일구는 시간, 약자를 보살피고 연대하는 참여의 시간, 더 좋은 삶을 상상하고 혁신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창조의 시간 등을 빼앗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한다면 한국 사회 전체가 과로 사회가 아니라 자유의 사회로 방향 전환해야 한다. 김영선은 “자유 시간이 풍부할 뿐 아니라 그 가치와 권리가 온전히 발휘되는 사회”로 변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귀담아들을 만한 말이다.


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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