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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모금] 근미래에 창궐하는 음모론 ‘...스크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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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 편집자주


소설은 21세기 초의 팬데믹 유행으로부터 얼마간 시간이 흐른 근미래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는다. 크게 두 가지 줄기(SE와 NE)로 전개된다. 한 줄기에서는 물리적 현실보다는 증강·가상 현실에 기반을 둔 복합 문화 단지 ‘메타플렉스’에 소속된 서점 ‘메타북스’ 점원들의 이야기가, 또 다른 줄기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음모론을 파괴하기 위해 창설된 초국가적 단체 ‘미신 파괴자’ 소속 대원들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각의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뒤섞고 생략하거나, 인과관계 없이 파편적으로 나열된다. 정지돈 작가는 ‘컷업’ 기법을 차용해 “현실과 비현실, 가상과 실재, 미디어와 메타미디어를 오려” 붙여 한 권의 책을 완성했다. 이는 각 개인, 그리고 저마다 마주한 현실이 분화될 대로 분화된 근미래의 일면을 효과적으로 선보인다.

[책 한 모금] 근미래에 창궐하는 음모론 ‘...스크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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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혈관 속에 들어간 캔-D가 벌써 약효를 내고 있었다. 어젯밤에 머신건을 훔쳤는데 총알이 없잖아……. 팔 수 있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거세졌고 수류탄만 한 빗방울이 쿵쿵 떨어졌다. 바닷물이 요트를 집어삼켰고 빗물 사이로 지느러미를 펼친 가오리가 녹색 형광물질을 번쩍이며 날아다녔다. 나와 리는 부둣가의 기울어진 콘크리트 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전봇대의 전단이 펄럭이고 있었다. 미신 파괴자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미신 파괴자들에 대해서 좀 알아? 오호츠크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아니…… 나는 입속으로 들어가는 차가운 빗방울들을 뱉으며 소리 질렀다.

-12~13쪽

프랜은 자신이 원하는 걸 진심으로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메타북스에 들어온 후 생각이 변한 걸지도 모른다. 프랜은 단지 말들을 떠돌게 하고 싶었다. 대단한 예술 작품, 베스트셀러, 히트작, 영원불멸의 클래식 따위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어떤 생각, 아이디어, 논평, 꿈, 일상, 작은 이야기, 사소한 논쟁 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슬프게 스치고 사라졌으면 했다. 이게 뭘까? 이건 어떤 종류의 꿈일까? 프랜은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고 누구도 이해시킬 수 없었다.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었고 어느 날에는 드라마를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어느 날에는 다시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통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도 완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오직 순간적인 것뿐이었다.

-71쪽


쉽게 비유해 보겠습니다. 서페이스 웹이 걸어서 갈 수 있는 장소라면 딥 웹은 자동차를 타야 갈 수 있는 장소예요. 또는 회원제 클럽과 퍼블릭 서비스 공간. 아니면 구글맵에 등록된 식당과 구글맵에 등록되지 않은 식당. 어느 쪽이 더 맛있냐고요? 먹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죠. 어느 쪽이 더 진정성 있고 더 프로다운 요리를 선보이냐고요? 그것 역시 알 수 없죠. 하지만 깊이의 개념으로 문제에 접근하면 먹어 보기도 전에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진짜는 더 아래, 숨겨진 곳에 있는 거야. 알려지지 않은 맛집이 진짜 맛집이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죠. 유명한 곳이 더 믿을 만해! 제 말은 둘 다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 안 된 사람?

-79쪽


…스크롤! | 정지돈 지음 | 민음사 | 204쪽 | 1만4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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