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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500년 느티나무는 기억한다…동학농민 보국안민의 함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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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민족의 삶 지켜온 느티나무

옥천 한곡리 느티나무 '옥천 35'호
동학군 지휘부 지휘소로 이용돼
제2대 교주 최시형, 대일항전 선언
수천명의 동학농민군 모여들어
나무 앞 너른 공터에서 군사훈련

옥천 효목리 느티나무 '옥천 33호'
임진왜란때 명나라군대 쇠말뚝 박자
마을선비들, 민족정기 회복 위해 심어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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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을에 사람보다 먼저 자리 잡고 사람보다 오래 살아가는 나무는 사람살이의 자취를 오래도록 서리서리 풀어내는 생명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기 십상인 옛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을의 큰 나무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나무 앞에 서면 아스라이 잊어간 기억들이 하나둘 옛사람살이의 향기를 피워낸다. 결국 이 땅의 큰 나무를 찾는 일은 이 땅에 남은 사람살이의 향기, 즉 역사와 문화를 되새기는 일과 결코 다르지 않다. 지금 이 땅의 큰 나무들을 다시 찾아보고 그 앞에 오래 머물러야 하는 까닭이다.


민족 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심었다는 이야기를 품은 '옥천 효묙리 느티나무' 풍경.

민족 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심었다는 이야기를 품은 '옥천 효묙리 느티나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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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군 청산면 효목리(孝木里)의 전주이씨 집성촌인 목동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 어귀에서부터 높지거니 우뚝 선 느티나무 한 그루가 바라다보인다. 보호수 지정번호 ‘옥천 33호’로 산림청에서 지정한 ‘옥천 효목리 느티나무’다. 첫눈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수형에 감탄하게 되는 나무다. 전주이씨 덕천군파 재실인 ‘숭덕정사’의 기와지붕과 돌담이 어우러진 느티나무 풍광은 저절로 옛사람들의 살림살이로 빠져들게 한다.

‘옥천 효목리 느티나무’의 나무높이는 19m,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6.2m의 나무인데, 나무가 서 있는 자리가 돌 축대를 쌓은 언덕 위인 까닭에 실제보다 훨씬 더 커 보인다. 곧게 솟아오른 줄기가 2.5m의 높이에서 둘로 갈라지며 나뭇가지를 사방으로 고르게 펼쳤는데, 그 품이 사방으로 30m를 훨씬 넘는다. 누구라도 찾아와 편히 쉴 수 있는 정자 한 채가 그 삽상한 그늘에 놓였다. 재실과 정자와 느티나무의 어울림이 한가롭다. 넓은 그늘 안에 사람살이를 품어 안는 느티나무의 전형적인 풍광이다.


긴 세월을 살아왔지만 사람들의 극진한 보호로 여전히 생육 상태가 왕성하다.

긴 세월을 살아왔지만 사람들의 극진한 보호로 여전히 생육 상태가 왕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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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는 마을에서 오래도록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이 느티나무는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군대가 마을 뒷산에 쇠말뚝을 박아 우리 민족의 정기를 박탈하려 했는데, 이때 마을 선비들이 민족정기를 회복하기 위해 심은 나무라고 한다. 오래된 나무에 전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나무에 얽힌 이야기 역시 기록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임진왜란 때에 심은 나무라고 전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면 나무 나이를 430년쯤으로 짐작할 뿐이다.


효목리 느티나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해발 445m의 천관산 자락 건너에는 한곡리(閑谷里)라는 유서 깊은 마을이 있다. 새들의 비행거리로는 2㎞ 남짓이지만, 가로막힌 산을 돌아가는 사람의 거리는 8㎞쯤 떨어진 곳이다. 한곡리는 ‘동학혁명’ 유적지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마을 끝 천관산 계곡으로 이어지는 초입에는 동학기념공원이 조성돼 있고, 이 자리부터 이른바 ‘동학역사 탐방길’이 시작된다. 저수지를 끼고 이어지는 조붓한 산길 약 3㎞ 구간의 탐방길은 풍광이 수려하고 청정한 공기의 우거진 숲의 계곡 길이어서 ‘역사 탐방’이 아니어도 걷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길이다.

동학역사 탐방길이라는 이름의 길이기는 하지만 동학농민군과 혁명운동에 관련한 유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산책로일 뿐이다. 탐방길 구간에서 옛 동학농민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건 오래 된 느티나무 한 그루다. 동학기념공원에서 저수지를 끼고 이어지는 탐방길을 700m쯤 걸어 오르면 길옆에서 만나게 되는 ‘옥천 한곡리 느티나무’다. 역사 탐방의 중심이 되는 대표적인 자취다.


사람의 발길이 잦지 않은 깊은 산골 산책로에서 쓸쓸히 옛 사람살이를 기억하고 서 있는 '옥천 한곡리 느티나무'.

사람의 발길이 잦지 않은 깊은 산골 산책로에서 쓸쓸히 옛 사람살이를 기억하고 서 있는 '옥천 한곡리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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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나이 500년, 나무 높이 17m, 가슴높이 줄기둘레 7.2m의 큰 나무로, 보호수 지정번호 ‘옥천 35호’인 노거수다. 탐방길 곁 너럭바위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옥천 한곡리 느티나무’는 줄기가 땅 위로 올라오면서 1.5m쯤 높이에서 둘로 갈라졌는데, 둘 중 서쪽의 줄기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곧게 올랐지만, 동쪽으로 뻗은 줄기는 45도 정도의 경사를 이루며 뻗다가 곧바로 두 개의 굵은 가지로 나뉘어 사방으로 17m 넘게 나뭇가지를 펼치며 너른 그늘을 드리웠다.


이 나무는 옛날 이곳에 절이 있던 시절에 절집의 스님이 너럭바위 자리를 좋아해서 자주 나와 쉬곤 하다가 바위 바로 옆에 심은 나무라고 전한다. 너럭바위 뒤편으로는 가늣한 개울이 흐르는 풍광이 좋아 바위 위에 주저앉아 오래 쉬고 싶은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절집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기록도 확인되지 않는다.


가뭇없이 사라져간 옛이야기에 포개져 또렷하게 남은 또 하나의 사람살이가 있다. 바로 1893년 동학농민전쟁 때의 이야기다. 그때 이 느티나무는 바로 동학농민군을 훈련시키던 동학군 지휘부의 지휘소로 이용됐다는 사실이다.


이곳 청산면 한곡리는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1827~1898)의 주도로 수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집회를 열었던 곳이다. 최시형은 1893년 4월 관군에게 쫓겨 이 마을로 숨어들어 동학농민군의 주요 인사들을 비밀리에 소집해 다음 전략을 도모했다. 그 증거는 ‘문바위’로 불리는 마을 뒷산의 큰 바위에 음각된 동학농민군으로 활약했던 박희근·김정섭·박맹호·김영규·김재섭·박창근·신필우 등 7명의 이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넓게 펼친 나뭇가지가 드리운 그늘의 너럭바위는 동학농민군의 지휘소였다.

넓게 펼친 나뭇가지가 드리운 그늘의 너럭바위는 동학농민군의 지휘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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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은 이 마을에 머무르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농민군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고 전주화약 이후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내정간섭에 나서는 일본에 대한 대일 항전을 선언했다. 1894년 9월18일, 전국의 동학 교도들에게 총기포할 것을 명령한 이른바 ‘청산기포’가 그것이다. 일원화한 지휘체계로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전국화 과정을 거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때 한곡리 마을은 수천 명의 동학 농민군이 모인 곳이라 해서 ‘새 서울’이라고 불릴 정도라고 한다.


구름처럼 모여든 농민군들이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군사훈련이 필요했다. 동학군의 지도자들은 몰려든 농민군을 산속으로 이끌고 들어가 훈련소를 차렸다. 그 훈련소를 차린 자리가 바로 지금의 ‘옥천 한곡리 느티나무’ 앞의 너른 공터였다. 나무 앞으로 펼쳐지는 넓은 공간은 조붓한 계곡 길의 어느 곳보다 군사 훈련에 알맞춤한 자리였다. 지금은 이 공간에 과수원이 들어와있다. 훈련소를 차린 지도자들에게는 전체 훈련을 지휘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지휘소가 필요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바로 느티나무 곁의 너럭바위였다. 한때 절집 스님의 쉼터였던 자리가 민족정기를 드높이기 위한 농민군의 지휘소로 바뀐 것이다.


동학혁명 탐방길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 되는 ‘옥천 한곡리 느티나무’는 사실 수세가 왕성하고 수형이 아름다운 나무라고 하기에는 모자란 상태다. 바위 곁이라는 불리한 조건에 홀로 우뚝 서 있기에 큰바람을 피할 도리가 없는 나무가 세월과 바람의 습격에 줄기가 찢겨 나가고 부러지는 건 하릴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동학혁명군이 이 자리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머물렀다는 것도 나무의 생육에는 결코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악조건을 버텨내며 나무가 살아남은 건, 그의 몸피에 담긴 사람살이의 간절함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큰 사람살이인 까닭이었기 때문이다.


외적의 침입에 대항해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심고 대를 이어 지켜온 ‘옥천 효목리 느티나무’, 그리고 산 너머 계곡 깊은 곳에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피 끓는 마음으로 군사훈련을 이어간 선조의 간절함을 바라보며 살아온 ‘옥천 한곡리 느티나무’. 모두 가물가물 잊어가는 사람살이의 향기를 그윽이 품고 살아남은 민족문화의 큰 자취이고, 오래 보존해야 할 우리의 자연유산이다.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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