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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밝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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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밝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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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소연 기자]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 곁에서 빛을 내어주는 사람. ‘귀인’이나 ‘은인’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모자란, 삶의 잔혹함을 한 겹 덮어주는 타인의 귀한 마음. 최은영 작가가 3년만에 펴낸 ‘밝은 밤’은 전쟁과 가난, 이혼과 배우자의 죽음 등을 겪으면서 피폐한 삶을 사는 주인공들이 어떠한 힘으로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 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서른두 살의 주인공 지연은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희령’이라는 도시로 훌쩍 떠난다. 남편의 외도로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희령 천문대의 연구원 채용공고를 보고 도망치다시피 이사를 결심한 것이다. 바닷가의 작은 도시인 희령은 열 살 때 할머니 집에 놀러가기 위해 방문했던 때를 빼면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곳이다.

희령에서 나아질 기미없는 유령같은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주말, 지연은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외할머니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을 계기로 할머니의 집에 방문하게 된 지연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듯한 분위기 속에서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다가 사진 한 장을 건네받는다.


사진 속에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두 여자가 미소 짓고 있는데, 그 중 한 명은 놀라울 정도로 지연과 닮았다. 할머니는 그 여자를 가리키며 자신의 엄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황해도 삼천에서 백정의 딸로 태어나 핍박받으며 살던 지연의 증조할머니가 어쩌다 양민의 자식인 증조할아버지와 만나게 됐는지, 어떤 삶을 살아내며 이곳 희령으로 오게 됐는지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밝은 밤’은 지연이 희령에서 새로운 생활을 이어가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와 할머니에게 전해듣는 과거 시점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증조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현재 지연에 이르기까지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꿰어나가는 이야기다.


여성들 간의 깊은 우정이 시간을 관통해서 그려지는데 백정의 딸로 태어나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하던 지연의 증조할머니가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우정을 나누는 모습이 가장 큰 줄기로 독자들의 가슴을 저릿하게 파고든다.


갈 곳 없는 피난 길에서, 돌봐줄 사람도 없이 아이를 낳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은 순간에도 서로의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이들의 우정은 1930년대라는 시간을 벗어나 현재를 사는 이들에도 큰 울림을 주며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십년만에 만난 외할머니와 가까운 듯 먼듯한 관계 속에서 어느 순간 치유의 힘을 얻는 지연의 모습도 또 다른 우정의 줄기를 이룬다. 부모나 배우자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내면의 상처로 곪아가던 지연은 외할머니의 담담한 위로를 통해 끝없던 마음의 수렁에서 벗어나 어느덧 회복의 길로 접어든다.


최은영 작가는 이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썼다.


"내게는 지난 이 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 그 시기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가 툭 치면 쏟아져내릴 물주머니 같은 것이었는데, 이 소설을 쓰는 일은 그런 내가 다시 내 몸을 얻고, 내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사람이 사람을 보듬는 이야기의 물길 속에서 치유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밝은 밤/최은영 지음/문학동네/1만4500원)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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