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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흑인들의 제 목소리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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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C. 울프 감독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블루스의 어머니' 마 레이니의 원칙 vs 흥겨움 강조한 레비의 새로운 도전
'美 연극계 셰익스피어' 어거스트 윌슨 원작, 음악 통한 화합…공존의 삶 강조

[이종길의 영화읽기]흑인들의 제 목소리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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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미국 시카고. 인기 흑인 가수 마 레이니(비올라 데이비스)가 스튜디오를 방문한다.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서다. 그는 지각하고도 버럭 화부터 낸다. 무더운 날씨와 교통사고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백인 제작자 어빈(제레미 샤모스)이 조심스레 다가가 녹음할 곡에 대한 의견을 말한다.


"마,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레비(채드윅 보스만)의 버전이 생기가 넘쳐서요."

"레비가 뭘 했든 관심 없어. 저 노래에 한 짓을 봐. 저렇게 부르는 거 싫어. 원래대로 부를 거야. 인트로 시키려고 내 조카도 데려왔잖아."

"요즘은 사람들이 춤출 수 있는 곡을 원해요. 레비의 편곡은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죠.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스트레스를 풀어준다고요."

"네가 뭐라고 하든 내 노래 망치게는 못 둬. 사람들이 그 곡을 원하면 다른 데서 연주하라고 해. 난 레비 노래 말고 내 노래 부를 거야. 더 얘기할 것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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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C. 울프 감독의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고전 블루스의 유지와 변화를 다룬 영화다. 남부 전통을 충실히 따르는 마의 버전으로 연주할지, 아니면 시대적 흐름에 맞춘 레비의 버전으로 녹음할지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주요 내용이다.


마 레이니(1886~1939)는 ‘블루스의 어머니’다. 웅장한 발성과 단순하면서도 극적인 목소리로 흑인의 애환을 노래했다. 블루스는 흑인이 겪은 고통을 표현하고 달랜 음악이다. 그래서 집단적 성격을 띤다. 모태도 노예 시절 목화 농장에서 일하며 부른 노동요다. 개개인의 파편화한 삶을 공동체 의식으로 엮어내고, 불협화음이던 삶의 질곡을 조화로운 화음으로 표현했다. 인종차별의 고통 속에 괴로워하던 민중의 외침이었다.


원작자 어거스트 윌슨(1945~2005)은 미국 연극계의 셰익스피어다. 그는 생전 인터뷰 중 ‘피아노 레슨’, ‘두 대의 기차가 달리고’, ‘울타리들’ 등 자기 작품들이 블루스에서 나오는 사상과 특성에 기초한다고 밝힌 바 있다. "블루스는 샘솟는 샘물이며, 영감의 원천이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상황으로 이끌고 그들만의 문화적 반응을 내포하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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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은 마와 레비의 대립으로 흑인의 역사·문화 계승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레비는 블루스를 춤에 적당한 재즈 스타일로 쉽게 바꿔버린다. 백인 제작자들처럼 블루스의 유행이 끝났다고 치부한다. 실제로 블루스가 쉽게 잊힌 건 그와 같은 세대들이 거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백인 문화에 편승하려던 흑인 중산층이 기피했다. 권력 관계에 따라 옮겨 다니다가 상실의 시대를 맞았다. 울프 감독은 이를 일깨우기 위해 영화 마지막에 백인들의 재즈 연주를 배치했다.


마는 블루스가 백인에게 상품화되는 상황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녹음에 앞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백인들은 블루스를 이해 못 해. 들을 줄은 알아도 어떻게 탄생한 줄은 모르지. 블루스에 우리 인생이 담겨 있다는 걸 몰라. 기분 좋으려고 부르는 게 아니야. 삶을 이해하기 위해 부르는 거지. 블루스는 아침에 눈을 뜰 수 있게 도와주지.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줘. 블루스가 만들어낸 무언가가 이 세상을 채워주고 있는 거야. 블루스 없는 세상은 공허하겠지. 나는 그 공허함을 무언가로 채우는 사람이지."


윌슨이 블루스 고유의 문화를 고수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다원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이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며 공존의 삶을 모색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마를 통해 블루스의 본질이 변하는 과정에 주목한 이유는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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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백인들은 흑인들을 이해하는 척할 뿐, 여전히 착취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스튜디오 사장인 스터디밴트(조니 코인)가 뒤늦게 레비에게 자신이 원하던 곡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약속과 달리 한 곡당 5달러씩 보상하겠다며 거드름을 피운다.


레비는 분노를 참지 못한다. 그런데 스터디밴트가 아닌 애꿎은 밴드 동료 털리도(글린 터먼)를 죽인다. 흑인들조차 화합하지 못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대목이다. 한편으로는 잃어버린 순수성을 재발견하고 스스로를 파악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다른 죄의식에 자기를 감금하는 듯하지만 블루스가 더해져 살풀이 같다. 털리도의 죽음과 레비의 몰락으로 전통과 변화의 적절한 수용을 강조한 것이다.


울프 감독은 그 실현 가능성을 블루스로 이야기한다. 녹음 전부터 불화했던 마와 밴드 멤버들. 블루스로 채워가는 순간만큼은 집단의식을 분출한다. 하나같이 진정한 블루스의 힘을 체감한다. "베이스 대체 어디서 배웠어? 베이스가 노래를 부르던데?" "털리도한테 맞춘 거예요. 길쭉한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마구 누볐잖아요." "그러려고 왔잖아."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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