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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생명을 향한 치열한 투쟁…단풍은 그래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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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단풍의 원리와 나무의 겨우살이 대책

단풍이 절정이다. 이 땅의 모든 나무가 초록을 내려놓고 겨울 채비에 나섰다. 시인 이제하는 단풍을 "허공에서 쓰러지는 목숨이 나무마다 나붙어 닢닢이 토하는 핏줄기('단풍' 중에서)"라고 노래했다. 나무의 생명살이에 대한 절묘한 비유다.


단풍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나무의 살림살이 방식부터 짚어봐야 한다. 나뭇잎은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다. 하늘의 빛으로 이 땅의 모든 생명에게 먹이가 될 지상의 양식을 짓는다. 지상의 모든 생명 가운데 양분을 짓는 건 나무밖에 없다. 어떤 생명이든 나뭇잎의 초록빛 엽록소가 광합성을 통해 지어내는 양분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뭇잎에는 엽록소 말고도 제가끔 다른 빛깔을 띠는 성분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다른 성분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광합성을 재우쳐야 하는 까닭이다. 광합성이 이뤄지려면 햇살을 잘 받아야 한다. 따라서 어떤 요소도 엽록소가 받아야 할 햇살을 훼방해선 안 된다. 엽록소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나뭇잎이 초록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광합성의 계절이 지나자 나뭇잎에서 초록빛은 사라지고 울긋불긋한 빛깔이 드러났다. 겨울이 다가오는 기미다. 단풍은 겨울을 채비하는 나무의 생존전략이다. 겨울이 온다는 이야기는 기온이 섭씨 0도 이하로 떨어져 물이 언다는 이야기다.


나무는 광합성에 필요한 물을 뿌리로부터 끌어올린다. 얄궂은 건 아무리 줄기가 굵은 나무라도 물을 끌어올리는 물관이 줄기 바깥쪽, 다시 말해 바깥 기온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는 부분에 있다는 사실이다. 줄기의 안쪽인 심재(心材)는 죽은 조직이고 변재(邊材)만 살아 있는 조직이다. 물을 끌어올리는 물관은 변재에만 있다.

변재의 물관을 따뜻하게 보호할 도리가 없다. 빙점 이하의 기온에서 물관 속의 물은 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물관은 부피가 팽창해 터지게 된다. 겨울에 수도관이 파열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무는 가지와 잎이 연결된 통로에 '떨켜'라는 조직을 만든다. 물을 덜어내기 위해서다. 뿌리에서부터 잎 위로 가늣이 펼쳐진 잎맥까지 이어지는 통로다. 햇빛으로 지어낸 양분을 나무의 몸통까지 옮겨주는 생명의 통로이기도 하다. 기온이 더 떨어지기 전에 나무는 떨켜층을 키워 이 통로부터 틀어막아야 한다. 통로가 막히면 물은 오르지 못한다. 물관에 남아 있는 물기는 목적지를 잃고 허공으로 빠져 나간다.

단풍의 숨은 명소, 영동선 열차 간이역 승부역의 단풍 풍경. 안토시아닌 성분을 많이 함유해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잎.

단풍의 숨은 명소, 영동선 열차 간이역 승부역의 단풍 풍경. 안토시아닌 성분을 많이 함유해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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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엽록소가 광합성 통해 양분 만드는 나무
겨울엔 물관 얼어붙어 팽창할 위험 커
저장했던 물 덜어내기 위해 통로 막아
자연스레 엽록소 파괴도고 갖가지 본색 드러내
겨울철 살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전략

그러면 시나브로 잎이 마른다. 햇빛과 이산화탄소, 물이 있어야 가능한 광합성을 이제 할 수 없다. 지난 계절까지 왕성하게 광합성하던 엽록소는 햇살과 이산화탄소를 모았다. 하지만 물이 없어 광합성을 완수하지 못한다. 엽록소는 하릴없이 힘을 잃고 서서히 파괴된다. 처음부터 나뭇잎에 들어 있었으나 광합성을 위해 엽록소 아래 숨어 있던 나뭇잎의 또 다른 요소들. 이제 빛깔을 드러낼 차례가 왔다.


나무마다 성분이 달라 안토시아닌을 많이 품은 나무가 있고 카로틴이나 타닌을 많이 품은 나무도 있다. 때로는 같은 종류의 나무라도 성분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이 성분들은 제가끔 다른 빛깔을 갖고 있다. 안토시아닌은 빨간색, 카로틴은 노란색, 타닌은 갈색을 가졌다.


엽록소가 파괴된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나뭇잎의 본색은 다양하다. 카로틴을 많이 함유한 은행나무나 아까시나무는 노랗게, 안토시아닌을 많이 머금고 살아온 단풍나무와 화살나무는 빨갛게, 타닌 성분이 많은 갈참나무·상수리나무·신갈나무는 갈색으로 화려해진다.


때로는 같은 종류의 나무이지만 단풍 빛깔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느티나무나 벚나무의 경우 한해살이 결과와 기후에 따라 빨간색·노란색·갈색이 번갈아 드러나기도 한다.


단풍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조건도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단풍의 원리를 생각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단풍 빛깔이 선명해지려면 엽록소가 빨리 파괴돼 잎사귀에 담겨 있는 안토시아닌·카로틴·타닌 등이 제 빛깔을 내야 한다. 무엇보다 짧은 시간 안에 나무 몸통 속의 물을 빨리 덜어내면 된다.


단풍철에 비가 많이 오면 안 되는 건 기본이다. 많은 일조량으로 수분을 빠르게 덜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가물어도 안 된다. 단풍 물을 올리기까지 필요한 시간 동안 적당한 양의 수분이 필요하다. 잎이 갑자기 마르면 붉은 물이 들기도 전에 잎부터 떨어져 고운 단풍을 볼 수 없다.


일교차가 커야 한다는 것도 고운 단풍의 조건이다. 기온이 아침에 낮아졌다가 낮에 큰 폭으로 오르는 일교차가 큰 날씨여야 나무의 몸에 든 물이 바짝 마른다. 그래야 나뭇잎은 이전의 초록빛과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깔을 드러낸다.


밤 기온이 크게 떨어지면 나무는 겨울의 신호를 알아챈다. 이에 물 공급을 막는 떨켜층은 더 빨리 키워진다. 남아 있는 수분을 날려보내는 증산작용은 더 활발해진다. 하지만 갑작스레 추워지면 나뭇잎은 부분적으로 동해(凍害)를 입어 단풍이 들기도 전에 떨어진다. 적당한 수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필요하다.


굳이 한 가지 조건을 더 보태자면 파란 가을 하늘이다. 대표적 단풍 빛깔인 빨간색·노란색·갈색의 배색 조건에서 파란색만큼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는 빛깔도 없다. 그래서 단풍을 즐기려면 파란 가을 하늘이 필수다.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이 맑고 높다는 것은 우리 단풍이 아름다운 근거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올해는 지난봄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를 겪으며 하늘이 더 맑고 높아졌다. 아름다운 단풍의 조건이 모두 갖춰졌다.

카로틴 성분이 많은 은행나무는 형광빛 노란 색으로 가을 단풍 빛깔을 올린다.

카로틴 성분이 많은 은행나무는 형광빛 노란 색으로 가을 단풍 빛깔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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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빛깔로 가을을 밝히는 경북 봉화 청량산 단풍 풍경

온갖 빛깔로 가을을 밝히는 경북 봉화 청량산 단풍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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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노랗게 혹은 빨갛게 단풍 빛을 올리면 우리는 아름답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무가 사람의 감정까지 배려해 그렇게 아름다운 빛깔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나무마다 사정이 있다.


나뭇가지와 잎 사이에 떨켜층이 성숙했다는 것은 낙엽할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다. 단풍 든 잎이 곧 떨어지는 것은 그래서다. 이제 나무는 모든 수고를 내려놓고 긴 겨울잠에 들어야 한다. 그러나 평안한 겨울잠을 위해 해결해야 할 나무의 걱정거리가 아직 남아 있다.


제 살 자리를 옮겨다니지 못하고 한자리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지내야 할 겨울이 걱정이다. 겨울에 나무는 최소한의 에너지만으로 겨우 생명을 유지하며 보낸다. 하지만 겨울에 활동하는 병해충으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다. 양분 공급도 없이 겨울잠에 곤히 빠진 나무로서는 병해충의 공격을 이겨낼 방법이 없다. 나무에게 겨울나기는 또 험난한 고행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무는 지난 계절 동안 안토시아닌을 더 많이 지어낸 것이다.


안토시아닌에는 '병해충 방제' 효과가 있다. 알고 보니 빨간 단풍은 나무가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는 동안 혹시라도 찾아올지 모르는 해충을 막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방비책이었다. 나무는 이제 안토시아닌이 가득한 빨간 단풍잎을 뿌리 근처에 내려놓는다. 빨간 잎에 들어 있는 안토시아닌은 뿌리 둘레의 흙으로 서서히 스며든다. 겨우내 깊은 잠에 든 나무를 지켜내는 유일한 무기다.


돌아보면 단풍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무 스스로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전략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벌판에서 홀로 찬 바람을 이겨내야 하는 것은 나무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고요해 보이지만 치열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제가끔 자기만의 멋과 아름다움을 지닌다. 그 아름다움에는 살아남기 위한 간절함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나무가 이 계절에 펼친 화려한 빛깔의 축제도 결국 오랜 세월을 거치며 체득한 간절한 생존전략의 흔적이다. 단풍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생명을 향한 치열한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허공에서 쓰러지는 목숨이 (…) 닢닢이 토하는 핏줄기"라고 노래한 이제하의 시 '단풍'이 절묘하다. 나무의 처절한 애옥살이를 더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계절, 가을이 깊었다. 이제 곧 겨울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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