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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하루 전 "盧 지지철회", 그날 밤 전화기에 불이 난 이유

최종수정 2020.10.01 09:00 기사입력 2020.10.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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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대선을 가르는 4개의 키워드 ②인물…2002년 정치 반전 드라마 이끈 평범한 시민들의 정치혁명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편집자주대권은 정치인의 꿈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의 정치적 고비를 넘어야 하고, 시대의 흐름을 타고 나야 한다. 한국 대선 역사를 되짚어보면 판도를 가른 요인은 추려낼 수 있다. 지역과 인물, 선거구도와 투표율 등 대선 판도를 좌우했던 키워드를 토대로 4회에 걸쳐 역대 대선을 분석해본다.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인 23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설치된 시민분향소를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인 23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설치된 시민분향소를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한국 대선 역사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는 대규모 유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얼마나 많은 지지를 받았는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대규모 유세에 성공한 정치인은 기세 싸움이 유리했고 실패한 정치인은 대선 가도에 타격을 받았다.


1987년 대선 때는 이른바 ‘100만 군중’이 참여하는 대선 유세가 벌어졌다. 서울 여의도 광장 등 대규모 인파가 모일 수 있는 곳에 유세 일정을 잡은 뒤 전국에서 구름처럼 인파가 몰렸다. 여의도 광장 주변은 전국에서 모인 전세버스 행렬로 장관을 이뤘다.

그 자리에 참여했던 이들은 엄청난 인파의 물결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고, 각자의 지역으로 돌아가 그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이른바 입소문의 위력이다.


전국 각 지역에서 100만명에 달하는 인원이 특정일에 특정 인물을 만나고자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00만 군중집회는 대규모 인력 동원에 필요한 조직과 자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11주년 행사 준비 스케치

노무현 대통령 서거 11주년 행사 준비 스케치



자금 동원력과 조직이 약한 정치인은 ‘큰 꿈’을 꾸기 어려웠던 것도 이 때문이다. 돈과 조직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해관계가 개입될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부패의 씨앗이 자라난다.

자금 동원력과 조직이 강한 정치인이 주름잡았던 한국 대선에서 ‘비주류의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 등장했다. 이른바 온라인 정치 혁명의 시대를 개척한 인물, 정치인 노무현이다. 그는 ‘바보 노무현’이라고 불릴 정도로 우직하게 한 길을 걸었다.


지역주의 타파를 실천하고자 현실 정치의 벽에 맞섰다. 2002년 대선은 노무현이라는 인물 한 명이 판도를 흔들어놓았던 선거였다. 대선에서 인물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줬던 대표적인 선거이다.


대선 하루 전 "盧 지지철회", 그날 밤 전화기에 불이 난 이유


정치인 노무현은 민주당 경선 때부터 파란의 주인공이었다. 당시 대세를 이끌었던 정치인 이인제와 맞서 명승부를 연출했다. 민주당의 대다수 의원들은 이인제 후보 쪽을 지원했다. 노무현 후보는 인터넷 게시판에서 ‘닉네임’으로만 활동했던 이름도 모르는 이들, 전국의 온라인 전사들이 최대 응원군이었다.


전통적 개념의 정치 조직력은 약했지만 온라인 선거혁명을 뒷받침할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지지율 2%에 불과했던 ‘약체’ 대선주자는 어느새 민주당 당내 경선의 판도를 흔들어놓으며 주인공이 됐다.


정치인 노무현은 대선후보가 된 이후에도 험로의 연속이었다.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당내에서는 이른바 ‘후단협’으로 불리는 이들이 힘을 얻으며 선거 구도의 변화를 꾀했다. 후보 단일화를 위한 모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원과 국민들이 선택한 정치인 노무현의 후보직을 박탈하기 위한 정치적 행보였다.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인 23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설치된 시민분향소에서 한 시민이 고인의 사진전을 바라보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인 23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설치된 시민분향소에서 한 시민이 고인의 사진전을 바라보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정치인 노무현은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정면 돌파하면서 고비를 넘었다. 본선에서 맞붙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조직은 탄탄했고 지역적 기반도 노무현 후보에게 앞섰다. 특히 대선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정몽준 후보가 지지 철회를 선언하면서 이회창 후보가 우세할 것이란 관측이 이어졌지만 노무현 후보에게는 이름 없는 시민들이 있었다.


정치인 노무현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전국의 수많은 시민들이 방어전선을 펼쳤다. 정몽준 후보의 지지철회 사태가 벌어지자 온라인은 말 그대로 불이 났다. 인터넷 게시판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와 응원 글이 넘쳐났다. 그들은 전화를 붙잡고 자신의 지인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며 밤을 새웠다.


평소 연락도 하지 않던 친구들은 물론 서먹한 관계였던 친척들에게까지 전화를 해서 투표 참여를 요구했다. 정몽준 후보의 지지철회로 노무현 후보의 낙선 가능성이 커지자 전국의 이름도 모르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노무현 후보에 대한 투표 독려 운동에 나선 것이다.


2002년 대선은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꾼 선거였다. 정치를 변화시키는 힘은 여의도 정가의 계파 보스가 아니라 시민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입증한 선거였다. 노무현 후보는 반전의 주인공이 됐다.


노무현 후보는 2002년 12월19일 제16대 대선에서 1201만4277표(48.91%)를 얻으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회창 후보는 1144만3297표(46.58%)를 얻었지만 낙선했다. 2002년 대선은 드라마의 연속이었다. 2% 지지율의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선거였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 온라인 정치혁명을 이끈 전국의 이름 없는 시민들의 힘이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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