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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가을귀]인간세계 붕괴에서 리히터의 비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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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슈라이버 '한 가족의 드라마'

[이종길의 가을귀]인간세계 붕괴에서 리히터의 비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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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표적 현대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소용돌이 친 독일 역사 속 비극적 가족사 조명

단순한 미술사적 접근 아닌 개인의 드라마 담아

사진을 그림으로 표현한 '하이데 씨'부터 회화에 자신의 이야기 반영

집단 안락사 희생양이 된 '마리안네 이모'와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던 '장인 오이핑어' 등

소재의 연관성으로 인간세계의 붕괴 드러내


독일 영화 '작가미상'(2018)에는 다양한 그림이 나온다. 금발색 바탕에 찍힌 여러 방향의 발자국들. 검은 캔버스에 일정한 크기로 그려진 흰 동그라미들. 쿠르트 바르네르트(톰 쉴링)의 작품이다. 그는 동독에서 사회주의 선전물을 그리다 서독으로 탈출한다.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 입학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런데 작품을 둘러본 지도교수는 별 반응이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르네 데카르트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었어. 모든 것이 환상, 속임수, 상상일 수 있다고. 그런데 무언가 있어야 그런 생각을 하잖아. 그러니 결국 무언가 존재하는 거지. 그는 그 무언가를 '자신'으로 부르기로 했어. 그런데 자네는 누구지? 자네는 무엇이지? 이건 자네가 아니야."


바르네르트는 독일의 대표적인 현대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바탕으로 채색된 배역이다. 리히터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 서독으로 넘어왔다. 그는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했다.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을 신조로 작업했으나 매번 실패와 맞닥뜨렸다. 가슴 속에서 끓고 있던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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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슈라이버가 쓴 '한 가족의 드라마'는 리히터의 삶을 조명한다. 그의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접근이 아니다. 독일 역사의 소용돌이와 개인사가 복잡하고도 비극적인 무늬의 그림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묵도한다.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집과 나치 독일의 집단 안락사로 사망한 마리안네 이모. 리히터는 그림의 소재로 사용한 사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당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재구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왜 내가 특수한 사진을 선택했는지, 어째서 이러저러한 사건을 표현하고 싶어 했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다만 내용과 관련된 이유가 있었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죠."


'한 가족의 드라마'는 그의 말대로 분명하지 않지만 막연하게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느끼며 직관적으로 선택한 소재의 연관성을 드러낸다. '작가미상'에서 바르네르트가 엘리자베스(자스키아 로젠달) 이모와 장인 제반트(제바스티안 코흐), 부르가프르트 크롤(라이너 복)의 얼굴을 겹쳐서 그린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각각 리히터의 '마리안네 이모'와 '장인 오이핑어', '하이데 씨'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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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터는 '하이데 씨'를 시작으로 회화에 자기 이야기를 반영했다. 베르너 하이데는 친위대 연대장이었다. 집단 안락사를 주도한 전략가로 약 10만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다. 리히터는 고전적 형태의 '부차적 회상'을 차용했다. 이는 주요 회상을 억제하는 것으로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꿈에 대해 연구하며 발견한 개념이다. 자기 경험에서 한 형상이 내쫓긴 주제 전체의 대표가 될 수 있는지 추론을 이끌어낸다.


리히터는 장인 하인리히 오이핑어에게서 충분한 가능성을 확인했다. 초창기부터 나치당원으로 활동한 산부인과 전문의다. 그는 나치 인종정책 실행을 자기의 소명으로 여겼다. '후손이 유전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하는 법'에 따라 여자 정신병자 1000명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했다. 리히터의 이모 마리안네는 그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한 가족의 드라마'는 복잡한 관계 속의 리히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리히터는 최소한 소문을 통해서라도 오이핑어가 친위대와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루네 문자로 만들어진 계급장을 달았던 히틀러 친위대에 관한 상상할 수 없는 사실이 매일같이 폭로되었다. '부차적 회상'은 화가가 어떤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고도 보여줄 수 있게 허용했다. 하이데를 소재로 한 것은 오이핑어를 겨냥했던 것이었을까? 두 사람은 '친위대 대원이여, 그대의 명예는 충성이다'라는 히틀러의 구호에 맹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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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미상'은 이 같은 추론을 조금 더 명확하게 제시한다. 제반트가 바르네르트와 저녁 식사를 하다가 신문을 보고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신이 대표적인 예다. 신문 1면 기사의 제목은 '환자 살인자.' 리히터도 잡지 '퀵'에 실린 사진 제목 '악마와 같은 정신병 치료 의사 베르너 하이데 박사, 감옥 입구'를 접하고 '하이데 씨'를 구상했다고 전해진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의의 손이 그를 붙잡았다. 의사들, 교수들, 관리들, 검사 한 명이 정의의 손에 붙잡혔기 때문이다."


리히터는 '하이데 씨' 하단에 "1959년 11월 경찰에 자진 출두하는 베르너 하이데"라는 기사를 삽입했다. 뉴스를 토대로 한 범죄자의 그림은 일종의 암호다. 그 속에는 생각과 상상, 감정이 들어 있다. 비밀을 풀어내면 화가의 비밀을 알 수 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사건으로 구성되는 존재다.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있고, 예술로 구성되는 인식이 있다. 리히터 또한 비슷한 말을 했다.


"모든 단어, 모든 붓놀림, 모든 생각이 시대, 시대 상황, 결합, 노력, 과거, 현재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결과적으로 독립적이며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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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리안네 이모'와 '장인 오이핑어', '하이데 씨'는 인간 세계의 붕괴를 나타내는 거대한 그림이다. 겉으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하지만 외부 요인이 개입되면 서로 연결돼 하나의 체계로 나타난다. 그 주변에 쳐진 상상의 경계선은 진실을 얻기 위해 넘어야 하는 벽과 같다. 리히터는 슬픔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어냈다. '한 가족의 드라마'는 그것이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을 모두 가리킨다고 말한다.


"가족의 재난, 3제국의 몰락 속에서 일어난 개인적 몰락, 후손들에게 보내는 소식, 예술과 현실에 관한 영화를 위한 소재. 전지(剪枝), 파기, 부서진 조각이 핵심 문제다. 각각의 부분이 전체를 가리킨다. 마지막에는 창백한 모국 독일에 대한 확실성이 생겨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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