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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의 벗 '6411번 버스' 그리고 '노회찬의 울림' [정치, 그날엔…]

최종수정 2020.02.03 16:08 기사입력 2020.01.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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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 구로와 강남을 달리는 서민들의 버스…노회찬 정당 대표 수락 연설, 반성의 메시지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추모문화제가 2018년 7월26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리고 있다. 참석하지 못한 시민들이 밖에서 영상을 통해 추도식을 함께하고 있다. /문호남 기자 munonam@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추모문화제가 2018년 7월26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리고 있다. 참석하지 못한 시민들이 밖에서 영상을 통해 추도식을 함께하고 있다. /문호남 기자 munonam@



“6411번 버스라고 있다. 서울시 구로구 가로수 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서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이다. 내일 아침에도 이 버스는 새벽 4시 정각에 출발한다. 출발한 지 15분 만에 신도림과 구로 시장을 거칠 때쯤이면 좌석은 만석이 되고 버스 복도까지 한 명 한 명 바닥에 다 앉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진다.”


2012년 10월21일 노회찬 당시 진보정당의 대표의 수락연설은 특별했다. 조국과 민족과 역사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정치적 수사(修辭)’로 포장된 수락 연설이 아니었다. 거창함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사람 냄새가 녹아 있는 ‘6411번 버스’ 관련 사연을 담아 이야기를 풀어갔다.


노회찬 대표는 “이 버스에 타시는 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을 해야 하는 분들”이라며 “새벽 4시와 새벽 4시 5분에 출발하는 6411번 버스가 출발점부터 거의 만석이 돼서 강남의 여러 정류장에서 50·60대 아주머니들을 다 내려준 후에 종점으로 향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전했다.


노회찬 대표가 정당 대표 수락 연설 자리에서 6411번 버스와 관련한 사연을 전한 이유는 정당의 역할, 정치인의 역할에 대한 물음과 관련이 있다.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누군가를 대신해서 정치의 길을 나서겠다고 선언했던 이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는 얘기다.

6411번 버스는 매일 새벽 고단한 몸을 이끌고 일터로 향하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얘기다.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서로의 삶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의 신기한, 아니 신비한 세계에 대한 얘기다.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 영결식이 2018년 7월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가운데 의원회관 고인의 사무실 문에 사진들이 붙어 있다./윤동주 기자 doso7@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 영결식이 2018년 7월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가운데 의원회관 고인의 사무실 문에 사진들이 붙어 있다./윤동주 기자 doso7@



매일 아침 동일한 시간에 버스를 타고 동일한 장소(대부분은 빌딩이 즐비한 강남)에 내리는 까닭, 6411번 새벽 버스를 이용하는 이들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노회찬 대표는 “아들 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에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고 있는 줄 의식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직장인들이 아주머니 또는 미화원으로 부르는 그들, 노회찬 대표는 그들을 ‘투명인간’에 비유했다. 노회찬 대표는 “이들은 9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이다. 그래서 이 분들이 유시민을 모르고, 심상정을 모르고, 이 노회찬을 모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노회찬 대표는 “그렇다고 해서 이 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는가.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가”라면서 “그들 눈앞에 있었는가.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는가.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는가”라고 되물었다.


노회찬 대표는 대한민국 정당, 특히 진보정당의 자성을 촉구했다. 엄숙한 언어로 꾸짖는 게 아니라 특유의 위트 섞인 사연을 통해 메시지를 전했다.


노회찬 대표는 “사실상 그동안 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다”면서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사회 낮은 곳의 목소리를 경청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느새 기성 정치의 폐해를 답습하고 있는 모습, 노회찬 대표는 그 부분을 지적한 게 아닐까.


노회찬 대표의 이날 6411번 버스 연설은 역대 정당 대표 수락 연설 중 손에 꼽히는 명연설이다. 정치라는 영역, 권력 주변부에서 그 힘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그들에게 자신의 삶을,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자는 권유의 메시지였다.


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꿈을 이어 가기 위해 설립된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창립기념공연이 서울 중구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렸다. 변영주 영화감독이 사회를 보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꿈을 이어 가기 위해 설립된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창립기념공연이 서울 중구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렸다. 변영주 영화감독이 사회를 보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한국 정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투명인간들의 고단한 삶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손을 잡고자 노력하는 정당의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한 줌도 되지 않는 권력을 잡고자 반칙과 편법을 일삼으며 ‘전진 앞으로’만 외치는 모습이었을까.


제21대 총선이 3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노회찬 대표의 6411번 버스 연설은 정치인들과 그 주변인들이 한 번쯤 곱씹어볼 만한 내용이다. 노회찬 대표는 이미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가 남긴 메시지는 현실 정치를 바꿔낼 변화의 씨앗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6411번 버스와 관련한 사연을 전했던 그 연설의 마무리는 이런 내용이었다.


“강물은 아래로 흘러갈수록 그 폭이 넓어진다고 한다. 우리의 대중 정당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실현될 것이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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