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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가을귀]회는 날것이 신선? 편견을 씹어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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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오쓰가 진노스케 '일본 요리 뒷담화'

[이종길의 가을귀]회는 날것이 신선? 편견을 씹어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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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 껍질을 벗겨 살을 얇게 저민다. 살결대로 가늘게 썰고 기름을 발라 접시에 담는다. 겨자와 초고추장은 식성대로 쓴다.” 조선 말기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에 기록된 어회(魚膾) 내용이다.


우리가 회를 먹는 방법은 더 다양해졌다. 간장이나 쌈장에 찍어 먹거나 초와 소금을 친 흰밥에 얹어 먹는다. 파, 마늘, 양파 등과 함께 매콤하게 양념한 뒤 찬물을 부어 먹기도 한다. 회는 이제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다.

일본에서도 회는 인기가 높다. 서민들은 에도 시대부터 회를 간장에 찍어 먹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이리자케를 곁들여 먹었다. 이리자케는 졸인 술이다. 술에 우메보시(매실 소금절임)와 대패로 얇게 민 가쓰오부시(가다랑어 살을 찌고 건조시키고 발효시켜 만든 가공식품)를 넣어 끓여서 만든다. 맛이 좋지만 가정 요리에서 조미료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손이 많이 가고 돈도 많이 든다. 그래서일까. 간장이 흔해지면서 술에 회를 찍어 먹는 식습관은 사라졌다.


간장의 대중화는 생선 나마스의 입지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나마스란 초무침 또는 초회를 말한다. 회를 소금에 절여 밑간한 뒤 식초, 설탕 등으로 새콤하게 무친다. 갓 잡은 생선에 소금을 뿌리면 잘 상하지 않는다.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감칠맛을 내는 성분인 아미노산도 생긴다. 당연히 갓 잡아 올린 날것보다 맛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적잖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하다. 오늘날 대세로 자리 잡은 간장에 찍어 먹는 회보다 요리하기 어렵다.


냉장고가 없던 시대에는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회 요리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초밥이다. 소금에 절인 회를 밥과 함께 두면 유산 발효로 산미가 생긴다. 일본인들은 그 맛을 빨리 내려고 소금으로 절인 생선에 곡물 발효 식초를 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메사바(고등어 초절임) 같은 식초 절임회는 보존성이 빼어나다. 나흘 뒤에도 상하지 않은 상태로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일본 요리 뒷담화’의 저자 우오쓰가 진노스케는 시메사바 같은 요리에 익숙하다. 1918년 개업한 유명 요릿집의 후손이다. 겨울에는 전어를 이용한 초절임이 잘 팔렸다. 저자는 “12월 24일 연중 어시장이 마지막으로 문을 여는 날, 전어를 잔뜩 사와서 소금에 한 번 염장한 뒤 식초에 푹 담가 만들었습니다”라며 “정월 연휴 내내 그리고 사흘이 지난 뒤에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적었다.


그의 요릿집은 미소된장과 섞어 ‘초미소’를 만들어 먹는 회 요리도 팔았다. 초미소된장은 약간 단맛이 도는 하얀 미소를 유자 등으로 짜낸 식초에 개어 만들었다. 그 맛이 간장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랐다고. 산뜻한 잉어나 도미 아라이(회를 물에 씻어 지방과 냄새는 제거하고 근육을 수축시켜 씹었을 때 꼬들꼬들한 감촉이 나게 하는 손질법) 요리에 잘 어울렸다고 한다.


“몸 길이 1m가 넘는 갈치회를 먹을 때는 지방이 풍부하기 때문에 와사비를 푼 간장이 어울리지만, 50㎝급 작은 갈치회에는 산뜻한 간장 맛으로는 조금 심심합니다. 이럴 때는 역시 초미소와 함께 먹어야겠지요.”


‘일본 요리 뒷담화’는 일반 요리 서적에서 보기 힘든 일본 음식의 역사, 제대로 식사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건강 향상의 노하우를 전달하며 독자 스스로 좋은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힘도 길러준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분별력이다. 도시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편의점 도시락이나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는 한편 유명한 식당을 찾아가고 몸에 좋다고 소문난 음식을 맹목적으로 챙겨먹는다. 여느 때보다 음식이 넘쳐나고 요리방송이 쏟아지지만 제대로 먹는 힘을 갖춘 사람은 많지 않다. 자기 밥상이 어디까지 추락하고 망가졌는지 모르는 경우도 부지기수. 저자는 강조한다.


“‘먹는 것에 감사합니다’라거나 ‘먹는 것은 곧 살아가는 것입니다’ 등의 정신론만 선행 학습시키는 오늘날 식생활 교육에는 ‘어째서?’, ‘왜?’라는 의문을 갖고 질문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식력, 먹는 힘입니다.”


먹는 힘의 결여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고유 음식이 내포한 가치까지 잃을 수 있다. 최근 들어 일본에서는 ‘일식의 세계화, 해외에 일식을 팔자’며 특히 회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와사비를 푼 간장에 찍어 먹는 회’만이 일식은 아니다. 사시미의 세계는 훨씬 더 깊고 넓다.


저자는 가열하는 회 요리만 다섯 가지를 나열한다. 마쓰가와즈쿠리와 유비키, 아라이, 시모부리, 다카키 등이다. 마쓰가와즈쿠리는 도미를 껍질이 붙은 채 회로 떠서 요리하는 음식. 도미 껍질 표면에 끓는 물을 한 번 붓고 재빨리 찬물로 식힌다. 이 조리 방법은 껍질이 오독오독 씹히는 식감을 살려내지만 위생에 도움도 준다. 공기 중의 잡균이 생선살 표면에 달라붙지 못하기 때문이다. 샤부샤부처럼 익히지 않아서 회의 감칠맛이 국물에 흘러가 버릴 일도 없다.


만들기 어려운 나마스도 위생을 고려해 만들어진 요리다. 생선을 통째로 씹어 먹기보다 잘라서 소금으로 맛을 들인 쪽이 먹기 편하고 맛도 좋다. 게다가 식초를 사용하면 제아무리 생선이라도 부패 속도가 늦춰진다. 특히 과즙이나 곡물 발효 식초 등을 생선에 사용하면 빨리 부패하지 않을 뿐더러 더 맛있어진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신선한 음식만 고집하는’ 방식이 아닌 ‘신선함을 살리는 방식으로 먹어온’ 일본 요리의 저력”이라고 역설한다.


“그대로 두면 신선도가 떨어져서 맛이 떨어지는 수준을 넘어 아예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생선을 되도록 오래 먹을 수 있도록 보존하고 게다가 더욱 맛있어지게까지 한다, 이런 점이야말로 세계문화유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정말로 ‘숙성과 부패는 종이 한 장 차이’였던 것입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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