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_progress

아시아경제 최신 기획이슈

[김희윤의 책섶] 식민지 조선, 두 언어를 써야했던 ‘소설가의 고뇌’

최종수정 2019.11.15 15:15 기사입력 2019.11.15 15:01

댓글쓰기

조선어·일본어 함께 쓴 춘원 이광수, 문학 근대화 위한 숙명이었나
‘이중어 글쓰기’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한 이광수의 작품세계

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전향 후엔 친일 인사로 대중에게 알려진 춘원 이광수는 조선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살다 대한민국에서 숨을 거둔 일생 동안 조선어와 일본어 '이중어'로 작품활동을 펼치며 다수의 소설과 시, 평론 등을 남겼다. 그래픽 = 이진경 디자이너

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전향 후엔 친일 인사로 대중에게 알려진 춘원 이광수는 조선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살다 대한민국에서 숨을 거둔 일생 동안 조선어와 일본어 '이중어'로 작품활동을 펼치며 다수의 소설과 시, 평론 등을 남겼다. 그래픽 = 이진경 디자이너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셋째 부인의 아들이란 조롱, 위로 줄줄이 있던 친형 셋의 잇따른 요절, 지독한 가난…. 생계를 위해 열 살 나이에 담배 장사에 나선 소년은 이듬해 부모를 콜레라로 모두 잃고 천애고아가 됐다. 동리에서는 '대학', '중용', '맹자'를 여덟 살 때부터 척척 읽어 내린 신동으로 통했지만, 고아가 된 후론 상경해 막일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가난과 함께 찾아온 폐렴과 결핵은 일생 그를 붙잡아 병약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막일이 어려워져 상점 종업원으로 일하는 동안 쏟아진 멸시와 냉대에도 소년은 가슴속에 품은 ‘글쓰기’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소설가, 춘원 이광수(1892~1950)의 이야기다.


천도교 서기 일을 보며 소공동의 일진회 일어학교에서 처음 일본어를 익힌 이광수는 일진회 관계자의 도움으로 열네 살에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1905년에 일본어를 배워 1907년 문단에 데뷔한 이래 1945년 광복을 맞기까지 이광수의 문학세계는 조선어와 일본어가 공존하는 이중어 글쓰기로 독자와 매체를 가로지른 여정의 연속이었다.


‘한국 유년에게 일문 교과서를 익히게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뇌수를 뚫고 저 소위 일본 혼이라 하는 것을 주사하고자 함이다.’ (사설, 대한매일신보, 1906. 6. 6) 강제병합 이전부터 집요하게 소학교용 일어독본과 주요 과목의 일본어 교과서 편찬을 통해 한글 배제를 추진한 일제는 강제병합 직후인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발표해 행정과 법률 문서에 일본어를 사용하고, 조선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 교과서를 일본어로 펴내며 국어로서의 한글의 지위를 박탈했다. 이즈음 일본 유학 중이던 이광수는 다수의 잡지에 시, 소설, 논설 등을 거침없이 발표하며 존재감을 알렸고, 한글이 아닌 일본어로 쓴 소설과 시가 일본 잡지에 게재되자 조선 유학생 사이에서 동경삼재(東京三才, 당시 동경 유학생 중 뛰어난 재능을 자랑한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 춘원 이광수)로 명성을 얻었다.


작가는 식민지 시대 조선어와 일본어를 함께 써야했던 소설가 이광수의 이중어 글쓰기에 주목하며 이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사진 = 소명출판

작가는 식민지 시대 조선어와 일본어를 함께 써야했던 소설가 이광수의 이중어 글쓰기에 주목하며 이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사진 = 소명출판


조선어와 일본어로 병행된 춘원의 작품활동


일본어 글쓰기로 내지인 못지않은 실력을 내보인 그였지만, 조선문학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에 대한 생각은 “조선문학이란 어디까지나 조선인이 조선문(朝鮮文)으로 작(作)한 문학이어야 한다” (문학이란 何오, 매일신보, 1916. 11. 23)는 글에서 엿볼 수 있듯 확고하고 단단했다. 하지만 식민체제 구축이 가속화되면서 그의 신념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삼엄한 당국의 시선 아래 조선어 글쓰기의 한계를 오가는 사이 일본어는 그의 창작영역에 서서히 틈입하기 시작한다.

이광수의 이중어 글쓰기에 대한 고뇌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소설 ‘무정’의 연재종료 직후 발표한 기행문 ‘오도답파여행(1917)’에 잘 드러나 있다. 충남·전북·전남·경남·경북 5도를 주유하며 조선 각지의 풍광과 명승고적, 산업과 세태를 사실적으로 담아내겠다는 기행문의 기획 의도 뒤엔 식민통치의 성과를 선전하고자 했던 총독부의 야욕이 숨어있었다. 당초 매일신보에 조선어로 연재된 이광수의 기행문은 이튿날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일본어 기사로 발표됐다.


두 매체는 조선에서 발행되는 신문이었으나 독자층은 확연히 달랐기에 학계에서는 여전히 이 두 매체에 게재된 기사를 이광수가 각각 조선어, 일본어로 작성했는지 아니면 이광수의 기사를 일본인이 번역해 내보낸 것인지에 대한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주목할 것은 총 53편의 통신문으로 작성된 기행문 중 이광수가 다도해와 경주 편을 일본어로만 작성한 사실이다. 덕분에 여행에 동행했던 친구 심우섭이 그의 원고를 조선어로 번역해 매일신보에 보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원고에 오역과 의역이 섞이게 됐다. 당시 이광수는 목포를 여행하던 중 이질(痢疾)을 앓고 입원 중인 상태였지만 일본어 글쓰기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44년 10월 발표한 ‘소녀의 고백’을 마지막으로 이광수의 일제강점기 일본어 창작은 끝을 맺는다. 수양동우회 사건(1937) 이후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에 뛰어든 그는 총 108편의 친일 문학작품을 발표했다. 문단의 친일 인사 중 압도적으로 많은 작품 수다. 해방 후 1948년 반민특위에 연행될 당시 이광수는 “내가 친일한 것은 표면상 문제이고 나는 나대로 친일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한 것이다. 내가 친일한 것은 부득이 민족을 위해 한 것이다”라고 항변했다. 두 개의 나라를 살아낸 식민조선의 이광수에게 이중어 글쓰기가 숙명이었다면, 친일 역시 예정된 숙운은 아니었을까.


<한국 근대 이중어 문학장과 이광수/최주한/소명출판/5만3000원>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간격처리를 위한 cl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