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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생활의 발견/이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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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먹다 남겨 둔 곰표 밀가루

봉지 열고 들어가

반죽을 개는 이 있으신지?


장마 내내

하품 옮기는 빗소리 쟁이며

곰은 무얼 빚으시는지?

보관 기간 지나고도 찾아가는 이 없는 분실물처럼

싱크대 옆 서랍에 처박혀

마늘도 쑥도 없이

어떻게 허기를 견디시는지?


생활의 여분은 기억 저편에 잘 모셔 두고

짐짓 모른 체하느라

가정용 다목적 박력분 슬픔을 버무려

곰돌이 푸우를 만들고 계시는지?


밀가루 뒤집어쓰고 북극으로 달려가

무너져 가는 한 세계 구원할

거대한 빙산을 만들고 계시는지?

계절이 바뀌도록 방구석 지키고 있는

늙은 공시생(公試生)처럼

세상의 구조를 기다리고 계시는지?


기다리다 지쳐 쭈그리고 앉아서는

저 빗속을 향해

발바닥만 한 수제비나 툭툭 떼어 넣고 계시는지?


[오후 한 詩]생활의 발견/이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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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되 애잔한 시다. 그런데 이 시를 읽고 곰곰이 헤아려 보니 나도 참 못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처럼 "세상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이의 안부를 궁금해한 적이 요 몇 년 동안 정녕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싶어서 말이다. 오히려 내가 전혀 안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실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에게만 연락하고 그랬던 것은 아닐까 싶어 얼굴이 홧홧거린다. 오늘은 우선 시간강사마저 그만두게 된 후배에게 문자라도 보내야겠다. 설렁탕이나 한 그릇 먹자고, 여전히 깍두기 좋아하냐고, 진심으로 그냥 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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