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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52]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에서

최종수정 2019.07.19 08:58 기사입력 2019.07.19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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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

윤재웅

폐허 비즈니스.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를 돌아보다가 폐허도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걸 실감합니다. ‘로마 시민은 조상 잘 둔 덕에 놀고먹고 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스러진 옛 제국의 흔적을 보러 지금도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옵니다.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할 필요도 없이, 조상의 유적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기만 해도 되는 것이지요. 판테온, 콜로세움, 카라칼라 대욕장 터…. 하지만 저는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가 그 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의 공공(公共) 광장이란 뜻이고, ‘팔라티노’는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건국의 정착지를 말합니다. 두 공간은 바로 붙어 있지요. 고대 로마의 중심지. 신전과 황궁과 원로원과 법정을 비롯해 로마의 문명이 집결된 곳. 이제는 망국의 전시장이 되었습니다. 허물어진 벽체며 간신히 서 있는 신전 기둥. 그 옆에 뒹구는 돌 조각들. 퇴락한 개선문과 천 년 전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돌 속에 스며 잠든 곳. 여기가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입니다.


패키지여행은 시간이 빠듯하지요. 이런 곳은 느긋하게 걸어 다니는 게 제격입니다. 자연을 느끼고, 역사를 생각하며,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바다가 24Km 밖인데 갈매기들이 많이 보입니다. 유적지의 폐허 사이를 날아다니며 새끼를 키우기도 하네요. 테레베 강을 따라 날아와 언제부턴가 로마의 시민처럼 늠름한 모습으로 주인 행세를 합니다. 사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학습을 한 것인지, 카메라를 들이대면 포즈를 취해주기도 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 신전이라는 작은 돌집 앞에 서니 인생무상의 느낌이 절절하게 밀려옵니다. 돌무더기 위에는 마른 꽃들이 쓸쓸하게 누워 있습니다. 여기는 최고 권력자인 그가 양아들 브루투스 일당에게 피살된 후 그 시신이 불살라진 화장터. 쏟아지는 폭우에 한줌 재마저 빗물에 쓸려내려 간 곳입니다.


문득 셰익스피어의 ‘햄릿’ 5막 1장에 나오는 햄릿의 독백이 떠오릅니다. “제왕 시저도 죽어서 흙이 되면/벽 구멍 때우는 바람막이가 될 수 있으렷다./오, 일세를 풍미하던 흙덩이./지금은 벽을 때워 찬바람을 막도다!” 막강한 권력자도 죽어서는 찬바람 막는 흙벽이 되고 만다는 허무를 노래하는 대목입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 52]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에서

최고의 건축술과 예술 솜씨를 자랑하는 로마제국. 찬란했던 영광의 도시가 폐허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천년 건축과 막강 권력도 모두 부질없지요. 하지만 이곳에는 스러진 영광만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축복도 있습니다. 쓰러진 기둥과 뒹구는 돌 조각 사이에서 봄풀과 꽃들이 기적처럼 돋아납니다. 새파란 하늘바다에, 흰 구름 배 떠다니는 그 순간에, 땅은 또 박자를 맞추어서 봄꽃들을 춤추게 하지요. 하얀 민들레, 파란 제비꽃, 붉은 양귀비….


제국의 영광이 찬란하다 한들 작은 풀꽃보다 오래가지 못하는 이치를 깨칩니다. 돌멩이는 새끼를 낳지 않습니다. 자기 혼자 오래 살다 닳아질 뿐이지요. 생명! 시간의 바통 터치를 통해 영구히 이어지는 몸의 건축술을 보여주는 게 바로 생명입니다. 여기 갈매기가 늠름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영생의 비결이 무엇일까요? 아상(我想)을 버리는 게 아닐까요? ‘나’라는 개체가 영속한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줄리어스 시저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기 전에 물려주어야지요.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몸을 물려주거나, 아니면 썩 괜찮은 생각을 다른 사람의 뇌에 이식해야 합니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밈(Meme)’이라고 부르는 ‘문화유전자’를 통해서 말입니다. 물려받는 사람이 내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나’는 어차피 ‘우리’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어려서 워렌 비티와 나탈리 우드가 주연한 영화 ‘초원의 빛’(1961)을 보다가 운 적이 있습니다. 거기 여주인공이 학교에서 워즈워스의 시를 낭송하다가 울음을 터뜨리지요. 사귀던 남자 친구와 결별을 하고난 뒤의 슬픔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짐에 따라/그대 사랑하는 마음 희미해진다면/여기 적힌 먹빛이 마름해 버리는 날/나 그대를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초원의 빛이여!/꽃의 영광이여!//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 말아라./그 속에 간직된 오묘한 힘을 찾을지라./초원의 빛이여! 그 빛이 빛날 때/그때 영광 찬란한 빛을 얻으소서!”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 폐허를 거닐다가 문득 발견한 풀꽃들. 변함없이 정확한 땅의 음악들. 색깔과 향기와 벌 나비 붕붕거리는 소리의 향연. 시인 정지용이 노래한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 같은 수수한 자태 뒤엔 또 얼마나 많은 풀씨, 꽃씨의 음표들이 태어나겠는지요. 찬란한 로마의 영광보다 작고 하잘것없는 생명이지만 세세생생(世世生生) 거듭해 살아가는 ‘오묘한 힘’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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