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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목길] 만리동 고갯길 - 이 골목에선 세월도 와서 고개를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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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최고령 이발소·한국 최초의 성당·첫 주상복합 아파트…이쯤돼야 '주민 대접' 받는 곳
재개발과 도시재생이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각광’

조선 초기 대학자 최만리가 살았던 곳이라 해서 '만리재'란 이름이 붙은 이곳은 마포구·용산구·중구가 맞닿는 경계지점이기도 하다. 서울 최고령 이발소, 한국 최초의 성당, 국내 첫 주상복합 아파트까지…옛스러운 풍경을 그대로 간직해 최근엔 도보투어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조선 초기 대학자 최만리가 살았던 곳이라 해서 '만리재'란 이름이 붙은 이곳은 마포구·용산구·중구가 맞닿는 경계지점이기도 하다. 서울 최고령 이발소, 한국 최초의 성당, 국내 첫 주상복합 아파트까지…옛스러운 풍경을 그대로 간직해 최근엔 도보투어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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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서울역 뒤편, 만리동 고개는 길고 가파른 길이라 꼭 만 리를 걷는 것 같다 해서 ‘만리재’라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니 조선 세종대왕 때 이름을 높인 학자 최만리가 살던 곳이라 이름이 붙은 것이더군요. 당대 집현전의 실질적 수장이었던 그가 한글 창제를 반대했을 때도 세종은 격노하되 그를 하루 만에 의금부에서 풀어줄 만큼 세상이 알아주고, 왕도 아낀 신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지명 유래 때문일까요? 이곳 골목 곳곳에는 고집과 신념으로 묵묵히 한길만 걸어온 이들의 흔적이 스며있습니다.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던 고가가 사라지고 마을은 한결 조용해졌다지만 풍경은 족히 반세기 시공 초월을 연상케 합니다. 1970년 완공된 서울역 고가가 제 역할을 다하고, 1년 6개월 공사 끝에 공중 산책로로 탈바꿈하면서 풍경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겠지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재개발된 만리동과 도시재생구역으로 보존된 서계동의 모습은 횡단보도만 건너면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만리시장 주변으로 들어서니 원단을 가득 실은 오토바이가 쉴 새 없이 오가는데요, 신호 대기 중에 기사님께 잠시 여쭤보니 이 일대에 소규모 봉제공장이 다수 밀집해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고가 있을 땐 그래도 좀 덜 막히고 납품 시간 딱딱 맞췄는데 요샌 돌아가느라 시간이 늦어져서 공장이나 배송 기사나 아주 예민해” 라며 사라진 고가를 두고 볼멘소리도 하시네요.

도로 양쪽 코다리를 매단 생선가게와 반찬가게를 지나 배문중·고를 스치고 나면 안쪽 골목에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 ‘성우이용원’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1927년부터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이남열(69) 이발사의 솜씨는 서울을 넘어 이미 전국구 장인으로 알려진 바 있지요.

1927년 문을 연 성우이용원은 현재 3대째 가업을 이은 이남열(69) 이발사가 운영 중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다. 사진 = 김희윤 기자

1927년 문을 연 성우이용원은 현재 3대째 가업을 이은 이남열(69) 이발사가 운영 중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다. 사진 = 김희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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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곳을 찾은 날엔 조금 특별한 손님이 이용원을 방문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오셨다는 한 노신사가 그 주인공인데요. 모처럼 찾은 고국에서 머리 한 번 시원하게 깎고 싶어 어렵사리 방문을 결심하셨답니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탄 손님이 이발소 앞 계단 3개가 버거워 쩔쩔매자 이남열 사장님이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오는 뒷문을 열어 손님을 맞는 모습은 어떤 손님이든 최선을 다해 모시겠다는 그의 신념의 발현일 것입니다.
골목 앞 이정표를 보니 이곳은 마포구 공덕동인데 길 하나 건너면 용산구 서계동이고, 시장을 지나 조금 내려오니 중구 만리동이라 합니다. 3개구의 경계지점인 셈인데요. 정작 지역 주민들은 길 하나 건너면 달라지는 주소 탓에 귀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십니다.

길 건너 재개발 후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만리동 고층 아파트 사이를 지나다 보니 고즈넉한 옛 벽돌 건물이 행인의 걸음을 반기고 서 있습니다. 1905년 설립된 최초의 민족사학 양정의숙 건물인데요. 지금은 이 학교 출신 한국인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양정고보 재학 중 선수로 발탁된 것이 아니라 1932년 서울에서 열린 동아 마라톤 대회서 2등을 수상하며 양정고보에 입학한 케이스였다고 기념관 관계자는 설명합니다.

故손기정 선수의 활동과 업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재탄생한 손기정 기념관(舊 양정고등학교). 사진 = 김희윤 기자

故손기정 선수의 활동과 업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재탄생한 손기정 기념관(舊 양정고등학교). 사진 = 김희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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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반도의 작은 학교에 불과했던 양정고보는 사실 세계적 기록을 낸 육상부를 보유한 학교였다고 하네요. 일본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출전 국가대표에 조선인 선수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조작과 억지 예선을 번복했음에도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가 실력으로 일본 선수들을 압도하며 출전해 나란히 금메달과 동메달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한 바 있습니다. 기쁘지만 슬픈 인상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인에게 큰 위로를 선사한 그의 표정은 일장기 말소사건의 사진으로 더 유명하지요. 기념관 한 켠엔 사진 속 그 순간, 아돌프 히틀러가 손기정 선수에게 월계수 대신 직접 수여한 참나무가 우람하게 자라 그 위용을 뽐내고 있습니다.

손기정 기념공원을 지나 중림동 방향 샛길로 걸어 나오면 한국 최초의 천주교 성당인 약현성당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천주고 고딕 양식 건축물이 전무했던 조선에서 서양식 벽돌과 중국에서 들여온 자재로 성당을 짓는 일은 큰 모험이었다고 하는데, 불행하게도 1998년 방화사건으로 전소돼 지금의 성당은 복원공사를 통한 새 건물이라고 합니다. 작고 아담한 규모와 한국의 첫 성당이라는 상징성으로 예비 신혼부부들 사이에선 혼배성사(결혼식) 명소로 유명하다고 하는데요. 1년에 한 번 있는 추첨이 순식간에 마감될 정도라고 합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의 성당답게 이곳은 다른 데선 보기 어려워진 장궤틀(미사 시 무릎을 꿇을 수 있게 되어 있는 틀)과 미사보를 쓴 신자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가톨릭 성당인 약현성당 내부의 모습. 사진 = 김희윤 기자

한국 최초의 가톨릭 성당인 약현성당 내부의 모습. 사진 = 김희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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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서 나와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중림시장과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 성요셉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름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본래 약현성당 신자를 위해 지어진 아파트라 지금도 성직자, 수도자가 많이 살고 계시다고 하네요. 재개발 논의가 몇 차례 있었지만 설립 당시의 주거환경을 살펴볼 수 있고, 건축 형태의 독특함을 인정받아 서울시가 미래유산 아파트로 지정해 오늘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60여 가구 규모인 아파트는 지어진 지 벌써 40년도 더 된 옛날 집이지만 동네 주민께 여쭤보니 욕실이 2개라 당시엔 신식 아파트로 명성이 높았다고 하네요. 지금은 청년들이 운영하는 카페와 헤어숍이 1층 상가에 입주해 젊은 손님들이 자주 오가는 ‘핫플레이스’로 변모하는 중입니다.

쓰임을 다한 고가도로가 하늘길이 되면서 고요함이 머물게 된 만리동 고갯길은 도시개발의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하는 공간이 됐습니다. 재개발로 올라선 만리동의 높은 아파트와 시간이 멈춰버린 서계동과 중림동의 옛집과 시장은 빠르게 성장해온 서울의 발전상을 고스란히 머금은 풍경으로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는데요. 아무쪼록 옛 모습이 소리 없이 사라지지 않기를, 서서히 물들며 변화해가는 공간을 지켜볼 수 있는 장소로 있어 주기를 고대해봅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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