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석은 일제강점기 때 수난을 면치 못했다. 임진란 때 명나라 지원군의 조선 파병에 대한 기록 때문이다. 비슷한 경우인 해인사 사명대사 비석도 땅 속에 묻혔다. 여수 진남관 이순신 장군 비석도 경복궁 뜰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없애지 않고 감추기만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만동묘정비는 1983년 홍수 때 땅에 묻힌 것이 드러났다. 공주 무령왕릉도 폭우 때문에 발견됐으니 문화재발굴에는 자연재해가 주는 긍정적 공로도 적지 않은 셈이다. 정비는 묻힐 때 이미 글자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상태였다. 그래도 '오리지널'이라 그 자리에 다시 세웠다. 다행히 한문으로 된 원문기록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계곡 옆 도로변에 새 비석과 한글 번역문을 같이 세웠고 주변 건물도 다시 살렸다. 역사복원도 복원이지만 지자체는 관광자원이라는 사실을 더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만동'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이다. 황하는 수만 번 꺾여도 필히 동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충신의 기개와 절개는 절대로 꺾을 수 없다는 의미도 그 위에 포개졌다. 중국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므로 중간중간 휘돌아 갈지라도 모든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기 때문에 대부분의 하천이 서해로 흘러든다. 따라서 이 땅에서는 만동묘가 아니라 '만서묘(萬西廟)'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문화권을 이동하면서 주체적인 소화능력이 부족하면 이런 오해 아닌 오해가 생기기 마련이다.
만동묘 계단은 엄청 가팔랐다. 그리고 그 숫자도 만만찮다. 족히 30개는 될 것 같다. 가로도 엄청 길다. 참배할 때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가라는 의미였다. 말에서 내려 걸어오라는 하마비(下馬碑)보다도 한 단계 더 급을 높인 셈이다. 과도한 예의는 비례(非禮)라고 했던가. 흥선대원군이 야인 시절에 참배를 왔다. 연로한 나이 때문에 가파른 계단을 혼자 오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하인들의 부축을 받았다. 위세 등등한 만동묘지기가 황제를 배알하는 예의에 어긋난다면서 엄청 구박했다. 인과는 금방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얼마 후 대원군은 정치적 실세가 됐다. 그 사건 때문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가장 먼저 문을 닫게 됐다. 그러니까 힘은 있을 때 아껴야 하는 법이다.
암서재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앉아 있는 세 칸짜리 소박한 토굴이다. 우암 송시열(1607~1689, 노론의 영수) 선생이 낙향해 글을 읽던 서재로 1666년 지었다고 한다. "시냇가 바위 위에 벼랑이 열렸으니 그 사이에 작은 집을 지었다(溪邊石崖闢 作室於其間)"는 시를 남긴 은거지다. 힘들게 찾아 온 만큼 구석구석 샅샅이 살폈다. 뒤편 화강암 벽에는 후손 송씨들이 다녀가면서 새긴 이름자도 보인다. 마루에서 바라보는 화양구곡은 선경 그 자체다. 범상치 않은 위치와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백골집 구조를 보아 하니 선비의 군더더기 없는 삶과 타협할 줄 모르는 꼬장꼬장한 근본주의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나 할까.
대문인 일각문 코앞의 큰 바위 틈 사이에 누군가 테이크아웃용 플라스틱 커피잔을 끼워놓았다. 그리 오래 된 것 같지는 않다. 어쨌거나 쓰레기는 치워야 한다. 한 손에 그것을 쥔 채로 좁고 가파른 자연석으로 된 계단을 다른 한 손으로 짚어가며 천천히 내려왔다. 하늘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새처럼, 잠깐 동안 다녀간 방문객의 흔적은 뒷사람이라도 지워야 했다.
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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