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의 대사가 유명한 것은 '술 권하는 사회'가 대학입시를 위한 필독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어 수업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내용이나 묘사에 대한 고민, 음미보다는 이 소설이 1921년 11월 '개벽'에 발표되었고, 3인칭 시점이고,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개척자인 현진건의 다른 소설은 '빈처' '운수 좋은 날' 등이 있다는 식의 그야말로 '사실'을 암기하는 데 급급했다.
식민지 시대는 현진건에게 술을 마시게는 했지만 대신 주옥같은 작품과 시대정신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 7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 사회는 술을 권하는 것을 넘어 별 가치 없는 모방과 '허접한' 지식의 대량생산을 강요하고 있다.
모방은 지식인의 죽음을 의미한다. 지식인의 결집체인 대학사회는 다양성과 창의성을 생명으로 한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사회는 타인과 차별화된 창의적 연구를 하면 도태되는, 논문의 양으로 승부하는 자가 질로 승부하는 자를 압도하는 '질육양식(質肉量食)'의 시대에 돌입했다. 가히 지식 생태계의 붕괴라고 불러도 좋을 시대이다.
둘째, 장기연구가 아닌 단기연구만 해야 한다. 해마다 일본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면 한국의 언론과 정부는 노벨상에 대한 대응책을 발표하며 소란을 떤다. 노벨상 수상자는 짧게는 20년에서 길게는 70년에 걸친 장기연구를 한 학자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장기 연구는 곧바로 승진 탈락을 의미한다. 아무리 위대한 연구를 해도 양적 기준을 채우지 못하면 탈락하기 때문이다.
셋째, 학자의 철학적 기반이 담긴 책을 쓰면 안 된다.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은 '위대한 탈출'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논문이 단편이라면 명저는 장편 대하소설과 같은 영감과 감동을 준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은 아무리 훌륭한 저서, 해외에서 인정받는 뛰어난 책을 쓰더라도 업적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따라서 그럴 시간이 있으면 논문을 대량 생산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왜 대학이 이렇게까지 타락해 버렸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양적 지표로 대학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은 저널에 게재된 논문 편수로 평가 받는다. 마치 수능 점수로 수험생을 평가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현진건에게 무의미한 논문을 대량 생산하라고 하면 또 밤늦게까지 술을 마실까. 씁쓸한 현실이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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