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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두주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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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무협소설 '천룡팔부'의 교봉은 전형적인 대장부다. 무협소설의 주인공답게 고강한 무공은 물론 강직한 성품과 '의리'는 역대 무협 주인공 중에 최고가 아닐까 싶다. 그는 주량에 있어서도 최강의 주인공이다. 음모에 빠지고, 거란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교봉은 무림 영웅에서 공적으로 처지가 바뀌게 된다. 그는 수백명의 군웅들이 모인 자리에서 술로 절교를 하는데 무려 60여 대접을 비웠다. 그리고 바로 수백명의 군웅들과 홀로 맞서 싸우면서도 밀리지 않았다.

천룡팔부를 읽은 지 몇 년 후 대학에 입학하니 온통 술이었다. '두주불사(斗酒不辭)'란 단어를 실천하려는듯 막걸리나 소주를 바가지에 부어 신입생들에게 마시게 했다. 무협지의 교봉처럼 말술을 마시고도 의연하고 싶지만 대부분은 '취권(醉拳)'의 성룡처럼 허우적거리다 땅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다.
사회에 나와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다음 날 숙취를 이기지 못하면서도 그 자리에선 절대 지지 않겠노라며 경쟁적으로 잔을 비운다. 술김을 빌어 정치ㆍ경제ㆍ사회 전반에 대해 '고담준론'을 펼친다. 전설적 주당들의 무용담도 곁들여진다. '20-20'이니, '30-30' 같은 스포츠 용어에 빗대 술 실력을 얘기하는데 소주 20잔에 폭탄주 20잔을 마시면 '20-20' 클럽이란다. 어떤 사장님은 홀로 73명의 직원들과 1잔씩 폭탄주를 주고 받았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술로만 따지면 교봉 수준이다.

'주폭(酒暴)'이란 단어가 사회적 이슈가 됐지만 대부분 주당들은 나와는 관계없는 단어라 여긴다. '주사'도 없는데 '주폭'이 웬 말인가 한다. 하지만 '술에는 장사가 없다'는 옛말은 틀리지 않기 마련이다.

초저녁부터 '소폭(소주와 맥주를 섞은 술)'을 부지런히 말아 마시던 어느 날이었다. 어지간히 취한 후배와 선배 집으로 쳐들어갔다. 위대한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인류에게 선사한 와인을 몇 병 동냈다. 술김에 회사 욕도 하고, 사장 욕도 하면서 혼자 잘난 체 떠들었다. 다음 날 나를 깨운 것은 집사람이 아니고 선배였다. 신이시여….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를 비웃던 테베의 왕 펜타우스는 환각에 빠진 그의 어머니와 이모들에게 찢겨 죽는다. 펜타우스의 어머니와 이모들은 디오니소스의 독실한 신자들이었으니 술에 대취해 끔찍한 일을 저지른 셈이다. 옛사람들은 술을 만들때부터 쾌락 뒤의 어두운 면을 간파했는데 아직 '두주불사' 타령을 하다 '취권'이나 하고 있으니 부끄러운 노릇이다.





전필수 기자 팍스TV 차장 phils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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