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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두향의 손을 잡은 공서(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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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25)

[千日野話]두향의 손을 잡은 공서(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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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서에게는 참으로 배울 바가 많습니다. 그 말씀은 음악을 이루는 율(律)과 여(呂)는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을 기르는 예의와 범절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율려의 자손이라고 하는 뜻은, 천성적으로 음악적인 재능을 많이 지녔다는 뜻도 되니 의미 있는 통찰이라 하겠습니다. 음악과 사람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 생각할수록 오묘한 진리입니다."
공서도 깊이 공명하는 듯 목청이 높아졌다.

"사또가 일전에 말씀하신 물아원무간(物我元無間)의 경지가 바로 그것인 듯합니다. 사물과 나 사이에는 원래 아무런 구별이 없었다는 말씀 말입니다."

"허허. 그걸 기억하셨군요. 봄날 뜨락의 풀을 보고 읊었던 시였던 것 같습니다."
두향이 말했다. "저 또한 요행히도 그 시를 들은 적이 있어 외웠습니다. 한번 읊어도 되올는지요?" 두 사람이 손뼉을 쳤다.

인정허금대창궤(人正虛襟對窓?)하니
한 사람이 있어 가슴을 활짝 열고 창문을 마주하니

초함생의만정제(草含生意滿庭除)로다
뜨락섬돌에 풀들이 가득 생기를 머금었구나

욕지물아원무간(欲知物我元無間)이어든
만물과 나 사이에 원래 구별이 없었던 것을 알고 싶거든

청간진정묘합초(請看眞精妙合初)하오
오묘하게 서로 합치는 첫사랑의 진짜 마음을 보게나

공서가 외쳤다. "절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봄날 풀 한 포기 돋는 것만 보아도 만물의 태초의 이치를 알 수 있다는 말씀. 정말 놀라운 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처음에 돋아낼 때의 생의를 보면 진지하고 순수하고 아름답지요. 사람이 태어나는 모습도 그러하고 사랑을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도 그러하고…."

퇴계의 목소리가 문득 나직해졌다. "실은 저 시를 읊던 때는, 마음이 고단하고 심령이 지쳐있을 때였습니다. 뜨락 계단에 돋아나는 풀들을 한참 들여다보며 크게 위안을 얻었기에 그 파릇파릇한 정기가 가상해 보이더이다."

두향도 말했다. "여러 번 느꼈던 생각이옵니다만, 사또 나으리의 시나 말씀을 들으면 늘 한 가지로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물이나 사람을 진심을 다해 대하려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매화를 대하는 마음이나, 어린 풀을 대하는 마음이나 모두 그 존재의 입장에 감정이입하여 깨달음을 이끌어내시는 도(道)에 늘 옷깃을 여미게 되옵니다."

공서가 문득 곁에 앉은 두향의 손을 덥썩 잡더니 말한다. "아니, 어쩌면 여인이 이토록 벗의 마음을 잘 읽는단 말이오?"

"부끄럽사옵니다."

두향의 얼굴이 붉어지자, 퇴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제가 이곳에 내려와 단양(丹陽, 붉은 해)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노을을 마주 대하는 느낌이외다."

공서가 껄껄 웃었고 두향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자, 자. 시흥이 이토록 도도하니, 술을 한잔씩 권하고 싶소이다." 공서가 술을 권했다. 잔을 들며 문득 퇴계가 말했다.

"아 참, 그런데 공서. 여기 며칠을 더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나와 함께 만나야 할 분이 계신데…." 밤이 깊었으나 세 사람은 일어설 마음을 잊었다. 한참 더 머무르며 유쾌하게 시간을 보낸 뒤에야 술자리를 파했다.

며칠 뒤 퇴계와 공서는 두향과 함께 구봉(龜峰)으로 향했다. 단양 서쪽으로 이십 리를 나아가면 장회(長淮)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서 있는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가 구봉이었다. 구담 아래엔 청풍으로 흘러드는 남한강물이 연못을 이뤄 장관을 이루는데 그곳을 구담(龜潭)이라 부른다. 겹친 산봉우리 아래를 후려치는 듯 삼엄한 절벽이 좌우로 늘어서서 물 아래로 내리꽂혀 있다. 우러러보면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 기괴하고 장엄한 형상이다. 이곳이 거북못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기암괴석 위에 있는 바위 형상이 거북을 닮았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공서가 퇴계에게 물었다.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퇴계와 소동파의 거문고詩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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