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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박형준의 '가벼운 향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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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이 향내를 풍긴다/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자/집은 드디어 빈집이 되었다/자물쇠가 꽉 채워진 방안으로/풀씨들이 넘나들며 꽃이 되었다/자물쇠에 앉아 나비가/날개를 폈다 오므린다/(……)/그렇게, 빈집은 이 세상의 향내를 불러들였다/추수철이 되면/빈집으로 들어가 수확을 해야할 것 같다/폐허가 향기롭게 익어간다

박형준의 '가벼운 향기' 중에서

■ 할머니는 대일댁(宅)이라 불렸고, 어머니는 아동댁이라 불렸다. 경주 영지(影池)의 대일마을에서 옮겨온 집 한 채와, 천군(千軍)의 골짜기마을에서 넘어온 집 한 채가, 고향 장제(長堤)에 들어앉아 다시 굳고 튼실한 한 채를 세워올렸으니 말하자면 집의 집의 집이다. 같은 집이라도, 사람처럼 자라고 늙고 삭아 시절마다 다르다. 어린 시절엔 따스한 볕이 마루에 내려앉고 쇠죽솥 아궁이엔 볏짚이 타올라 아랫목이 뜨뜻했던, 온기의 중심이었는데, 지금은 춥고 어둡고 바람벽이 흔들릴 듯 위태위태하다. 박형준은 집안에 사람이 물러나면서 그제야 사물들이 가벼워지는 풍경을 말했지만, 나는 사람과 시간과 집이 함께 부실한 이를 악물려 버티는 악몽을 꾼다. 잠 없는 밤의 검은 집이 밤새도록 관절염을 앓는 소리를 듣는다. 구석구석 부지런한 걸레질로 훔치고 또 훔쳐 반들반들했던 장롱 아래로 먼지가 쌓이는 소리와 작은 벌레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사람이 스스로를 추스르는 일이 버거워질 때, 집도 하던 일을 멈추고 주저앉아 사람을 향해 헐떡거린다. 저 집이 바람에 몸을 털며 육탈(肉脫)하는 시를 바라보며, 괜히 눈물이 글썽거린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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