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아,저詩]이희중의 '숨결' 중에서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오래전 할머니 돌아가신 후/내가 아는 으뜸 된장 맛도 지상에서 사라졌다//한 사람이 죽는 일은 꽃이 지듯 숨이 뚝 지는 것만 아니고/목구멍을 넘나들던 숨, 곧 목숨만 끊어지는 것만 아니고/그의 숨결이 닿은 모든 것이, 그의 손때가 묻은 모든 것이,/그가 평생 닦고 쌓아온 지혜와 수완이/적막해진다는 것, 정처 없어진다는 것/(……)

이희중의 '숨결' 중에서

■ 노인 한 명이 죽으면, 손때 묻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속담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만큼의 지식과 경륜을 지니고 있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그냥 서재 하나가 불타는 걸로 줄이면 안될까, 하는 쑥스런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 시를 읽으면, 그런 '죽음의 자격' 같은 것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한 사람이 이 지상에서 사라질 때, 그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유일무일한 존재감이 역사 속에 파묻히는 것이다. 그가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어도, 한 생애의 미시사에 깃든 그 사람만의 스토리가 사라진다. 하늘이 생명을 내고 인간을 낼 적에, 그 어떤 존재도 똑같이 만들지 않았으며, 똑같은 의미와 똑같은 궤적을 그리는 일이 없도록 고유의 식별코드를 부여하지 않았나 싶다. 덧없는 삶과 허망한 죽음으로 보일지라도, 조물주로선 오직 우주 유일의 존재를 켰다가 끈 것이다. 이희중 시인처럼 나의 외갓집도 된장 맛 하나는, 내 입과 혀에 최고였다. 외할머니가 돌아간 뒤, 나는 인류 된장사(史)의 종장을 읽은 듯 했다. 세상의 모든 장독대와 항아리와 빛과 소금과 주름진 손이 다 모여 공력을 들여도, 눈감은 외할머니의 숟가락에 들려있던 된장국물을 이길 수 없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하이브 막내딸’ 아일릿, K팝 최초 데뷔곡 빌보드 핫 100 진입 국회에 늘어선 '돌아와요 한동훈' 화환 …홍준표 "특검 준비나 해라" 의사출신 당선인 이주영·한지아…"증원 초점 안돼" VS "정원 확대는 필요"

    #국내이슈

  • '세상에 없는' 미모 뽑는다…세계 최초로 열리는 AI 미인대회 수리비 불만에 아이폰 박살 낸 남성 배우…"애플 움직인 당신이 영웅" 전기톱 든 '괴짜 대통령'…SNS로 여자친구와 이별 발표

    #해외이슈

  • [포토] 세종대왕동상 봄맞이 세척 [이미지 다이어리] 짧아진 봄, 꽃놀이 대신 물놀이 [포토] 만개한 여의도 윤중로 벚꽃

    #포토PICK

  • 게걸음 주행하고 제자리 도는 車, 국내 첫선 부르마 몰던 차, 전기모델 국내 들어온다…르노 신차라인 살펴보니 [포토] 3세대 신형 파나메라 국내 공식 출시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전환점에 선 중동의 '그림자 전쟁'   [뉴스속 용어]조국혁신당 '사회권' 공약 [뉴스속 용어]AI 주도권 꿰찼다, ‘팹4’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